택시 기사님은 공항에서 시내까지 가는 내내 브리스톨 사투리로 열정적인 관광 가이드를 해주셨고, 저는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채 웃고만 있었어요. 그게 저와 영국 영어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십수 년 영어를 배웠는데, 정작 영국 땅에서 제가 완벽하게 알아들은 말은 "헬로우" 하나였다는 이야기 — 오늘은 그 첫날부터 7년 후까지의 이야기를 해볼게요.
브리스톨 도착, 공항에서 헬로우만 알아들었다
브리스톨까지는 직항이 없어서 KLM을 타고 암스테르담을 경유했어요. 거기서 장난감 같은 경비행기로 갈아타고 덜컹덜컹 도착한 브리스톨 공항. 긴장 반 설렘 반으로 입국장을 나서는데, 들려오는 영어가 이상했어요. 분명 영어인데, 제가 아는 영어가 아닌 거예요. 토익이며 텝스며 그렇게 오래 붙잡고 있었던 영어인데, 정작 현지인의 첫마디는 어디서도 배운 적 없는 낯선 소리였어요.
그리고 그 택시였죠. 기사님은 창밖 풍경을 가리키며 뭔가를 신나게 설명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브리스톨 토박이 사투리로 해주신 무료 관광 가이드였어요. 클리프턴 다리 이야기였는지, 항구 이야기였는지 — 지금도 정확히는 몰라요. 저는 알아듣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예스, 예스"만 반복했고요. 리스닝 만점을 받아본 사람의 자존심이 공항 택시 안에서 산산조각 나던 순간이었습니다. 숙소에 도착해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며 생각했어요. '이 나라에서 나, 잘 살 수 있을까.'
영국 영어 현지 단어, 교과서엔 없었다
살다 보니 알겠더라고요. 문제는 제 귀가 아니라 교과서였다는 걸요. 영국인들은 러블리, 판타스틱, 테리픽을 입에 달고 사는데, 한국에서는 이런 영어를 배운 적이 없잖아요. 특히 러블리 — "사랑스러운"이라고 외웠지만, 실제로는 아무 의미 없는 말끝 추임새예요. 거스름돈을 받아도 러블리, 날씨 얘기를 해도 러블리, 마트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밀어도 러블리. 처음엔 제가 뭘 잘못했나 싶어 당황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냥 숨쉬듯 나오는 말이더라고요.
결정타는 CHEERS였어요. 건배 아니냐고요? 영국에서는 "고마워"예요. 버스에서 내릴 때 기사님께 치어스, 문을 잡아줘도 치어스, 펍에서 맥주 한 잔을 건네받아도 치어스. 처음엔 다들 술을 그렇게 좋아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냥 감사 인사였던 거죠. 교과서가 아니라 몸으로, 매일의 실수와 민망함으로 익힌 단어예요.
물론 한계도 있었어요. 스코틀랜드 영어는 7년을 살아도 끝내 못 알아들었거든요. 에든버러 여행 때 카페에서 주문을 받던 직원분의 말이 영어인지 다른 언어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어요. 그때는 아무도 저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예요.
영국 영어 7년, 워러 아니고 오우 워터로
그렇게 7년을 살면서 저는 영국 영어의 매력에 완전히 빠졌어요. 혀를 굴리지 않아서 오히려 한국인에게 쉽고, 악센트가 또렷해서 노래처럼 들리거든요. 미국 영어의 리듬과는 또 다른, 또박또박 끊어지는 그 말투가 어느 순간부터 참 듣기 좋았어요.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어요. 제 발음이 바뀌어 있다는 걸요. "워러"가 아니라 "오우 워터". Can't도 "캔트"가 아니라 "칸트"에 가깝게. 영국 억양과 콩글리시가 섞인, 세상에 없던 저만의 짬뽕 영어가 완성된 거죠.
웃긴 건, 저도 미국에서 1년 살다 와서 혀 꼬며 말하는 사람들을 속으로 흉봤던 사람이라는 거예요. "한국에서 평생 살았으면서 무슨 원어민 흉내야" 하면서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니 저도 모르게 영어 단어가 툭툭 튀어나와요. 친구들과 대화하다가 "어 그거 완전 러블리했어" 같은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그럴 때마다 스스로도 웃겨요. 싫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되어버린 걸 보면, 이제 누굴 욕하겠어요.
그래서 저는 영어를 다시 시작하는 분들께 영국 영어를 권해요. 같은 영어인데 단어도 문법도 어휘도 달라서, 이미 아는 언어를 완전히 새로 배우는 듯한 신선한 동기 부여가 되거든요. 무엇보다 — 언젠가 브리스톨 택시에서 기사님의 관광 가이드를 알아듣게 되는 날, 그 기쁨은 리스닝 만점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