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이혼 목격 ""딸을 데려가 주세요"

15년 전 나는 영국인 커플의 이별을 지켜보고 글을 쓴 적이 있다. 3년을 동거하며 남자 쪽 가족 행사에 다 참석할 정도로 가까웠던 여자친구에게, 남자는 어느 날 "행복하지 않았다"며 이별을 선언했다. 여자가 믿지 않고 버티자 남자는 집을 나가버렸고, 일주일 후에야 남자의 부모가 사태를 알고 나서면서 다들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걸 알게 됐다. 결정적인 장면은 남자가 여자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한 말이었다. "우리는 이제 끝났으니, 딸을 데리고 가 주세요." 그 후 여자의 부모가 딸을 데리러 왔고, 그걸로 상황은 일단락됐다.

그때 나는 이걸 "쿨하다 못해 냉정하다"고 봤다. 부모는 이별이 다 끝난 뒤에야 등장해서 뒷수습만 하는, 철저히 당사자 둘만의 일이라는 구도였으니까.

그때 내가 목격한 '쿨함'

당시 댓글 반응도 지금 다시 보니 재미있다. "한국이었으면 여자 부모가 쫓아가서 남자한테 분풀이했을 거다", "우리나라 정서로는 이해 안 간다"는 반응이 많았다. 나 역시 그 글 말미에 "한국이었다면 부모들이 쫓아가서 분풀이를 하거나, 다시 살라고 타일렀을까"라고 물었었다. 그때는 한국의 부모란 자식의 연애·결혼·이별에 개입하는 게 당연했고, 영국은 그 반대라고 생각했다.

15년이 지난 지금, 정말 비슷해지고 있을까

최근 이 글을 다시 보다가, 요즘 한국은 좀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자료를 찾아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가 처음 짐작했던 것과는 결이 좀 달랐다.

가장 눈에 띈 건 황혼이혼 통계였다. 60세 이상 부부의 이혼이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전문가들은 그 배경으로 "자녀 세대가 부모에게 무조건적인 결혼 유지를 강요하기보다 개인의 행복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커졌다"는 점을 꼽았다. 예전 같으면 자식들이 나서서 "그래도 참고 사시라"고 말렸을 상황을, 이제는 자식들이 오히려 부모의 결정을 지지하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거다.

부모가 '말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나서는' 경우도 많더라

젊은 부부의 이혼을 다룬 다른 글에서는 또 다른 각도가 보였다.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의 세대 차이를 "150년"에 비유한 표현이 있었는데, 그만큼 사고방식의 격차가 크다 보니 신혼부부 사이에서도 쉽게 이혼 얘기가 나온다는 분석이었다. 전국 통계나 기사 자료로 확인되는 건 딱 여기까지였다 — 부모가 예전만큼 결혼 유지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정도.

그런데 내 주변을 돌아보면 얘기가 좀 더 나아간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부모가 자식의 결혼 뿐 아니라 이혼에도 직접 나서는 사례를 심심찮게 본다.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양가 부모가 먼저 이혼을 부추긴 경우도 내 주변에 꽤 있다. 생각해보면 어색한 일도 아니다. 애초에 한국은 결혼 자체를 두 집안이 성사 시키는 문화가 뿌리 깊은 곳이었으니, 그 결혼을 정리하는 국면에서도 똑같은 손이 다시 나서는 건 자연스러운 연장선일 수 있다. 결혼을 시켰던 그 열의가, 이제는 이혼을 시키는 쪽으로 방향만 바꿔서 작동하는 셈이다.

그러니 정리하면 이렇다. 통계로 잡히는 건 "부모가 참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완곡한 흐름이지만, 실제 생활 반경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자녀 부부가 흔들릴 때 양가가 개입해서 아예 결론을 함께 내려버리는 것. 예전엔 그 개입의 방향이 "참고 살아라"였다면, 지금은 "그만 살아도 된다"로 방향 자체가 바뀐 집들이 늘고 있는 거다.

그래도 영국과는 다른 지점이 남아 있다

그렇다고 완전히 영국식이 된 것도 아니다. 영국의 그 사건에서 부모는 정말 "사후 수습" 역할에 머물렀다 — 이미 끝난 관계를 정리하러 왔을 뿐, 끝낼지 말지를 결정하는 자리에는 없었다. 반면 한국은 양가 부모가 그 결정 자체에 함께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즉 영국은 개입의 '시점'이 이별 이후로 확실히 좁혀져 있는데, 한국은 그 개입이 결정의 순간까지 파고든다는 점에서 여전히 큰 차이가 있다.

그때는 냉정하다고 봤는데, 지금은 각자의 방식으로 보인다

15년 전엔 그 남자의 "딸을 데려가 주세요"라는 말이 낯설고 차갑게 들렸다. 지금 다시 보면, 그 말은 여전히 한국에서 나오기 어려운 말인 것 같다. 다만 그 이유가 예전과는 달라졌다. 그때는 부모가 자식 부부를 어떻게든 붙여 놓으려 했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부모가 그 결정 안에 깊숙이 들어와 함께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 영국은 부모의 역할을 이별 '이후'로 좁혀 놓았고, 한국은 그 역할을 이별의 순간 '안'으로 옮겨 놓았을 뿐, 어느 쪽도 부모가 완전히 빠지지는 않았다. 15년이 지나도 그건 똑같다.

결혼했는데 왜 남처럼 살아? 영국은 안 그런데

며칠 전 친구를 만났는데 예전부터 듣던 말이지만, 이번에는 나에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부부 사이인데 대화가 없다는 거다. 정확히는, 아이 얘기 빼고는 할 말이 없다는 거였다. 오로지 아이 양육에 관련된 것만. 딱 거기까지. 정작 서로가 요즘 뭘 생각하는지, 뭘 힘들어하는지 모른단다. 생활비만 반반 부담하고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이혼은 안 했어. 근데 그냥... 남처럼 살아."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는데,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 주변에 이런 부부, 생각보다 많다.

영국은 이혼을 왜 그렇게 쿨하게 말할까

영국에 살면서 제일 낯설었던 것 중 하나가 이혼을 대하는 태도였다. 결혼해서 성을 안 바꾼 사람도 흔하고, 계좌는 애초에 따로 쓰는 게 기본값에 가깝다. 시댁 어른들 세대만 해도 "우리 옆집은 이번에 갈라섰어" 하는 얘기를 커피 마시면서 아무렇지 않게 한다. 숨기고 자시고 할 일이 아니라는 거다.

실제 수치도 그 얘기를 뒷받침한다. 이혼 후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면서 영국의 1인 가구가 800만 명을 넘어섰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른바 '실버 스플리터(silver splitter)'라 불리는 중장년층 이혼이 그 흐름을 밀어 올렸다는 분석이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건 이혼까지 안 가고 "따로 사는 결혼"을 택하는 사람들이다. 영국 통계청(ONS)이 인용한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로리 콜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23년까지의 영국 가구 종단조사(UKHLS) 데이터를 분석했더니 60세 이상 영국인의 약 4%가 이른바 'Living Apart Together(LAT)' 관계였다. 결혼 여부와 무관하게 파트너로 지내지만 집은 따로 쓰는 거다. 2021년 영국 센서스에서도 법적 파트너십은 있지만 실제로는 따로 사는 인구가 3%로 집계됐다.

한국은 이혼 대신 '한 집 안의 남'을 택한다

한국은 다르다. 이혼율 자체는 이미 높은 편인데도, 이혼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뭔가 실패의 낙인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 부모님 보기 민망하고, 아이 친구 엄마들 사이에서 뒷담화 주인공이 되는 것도 싫고, 회사에서 알게 되는 것도 부담스럽다. 그러니 선택지가 좁아진다. 갈라서지는 않되, 마음은 이미 갈라선 채로 한 집에 사는 거다.

내 주변 부부들을 보면 패턴이 비슷하다. 대화는 아이 문제로만 오간다. 재정은 공동 경비만 정해 놓고 나머지는 각자 벌어서 각자 쓴다. 서로의 하루가 어땠는지, 요즘 뭐가 힘든지는 물어보지 않는다. 겉으로는 평범한 가족사진 속 부부인데, 속은 완전히 다른 살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혼 서류 한 장 안 썼을 뿐, 사실상 졸혼이나 다름없다.

같은 '따로'인데 방향이 다르다

여기서 정직하게 짚고 싶은 게 있다. 영국의 LAT와 한국의 이 현상은 비슷해 보이지만 방향이 반대다.

영국 쪽 연구에서는 LAT 상태의 노년층이 혼자 사는 사람보다 정신 건강이 낫고, 결혼·동거 상태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즉 영국의 '따로'는 대체로 스스로 고른 선택이고, 관계를 유지하되 자율성을 지키려는 적극적인 결정에 가깝다.

반면 한국 부부들이 말하는 '남처럼 산다'는 건 물리적으로는 한 집인데 정서적으로만 멀어진 상태다. 누구도 먼저 선택 했다기보다, 대화가 줄어들다 보니 어느 순간 그렇게 굳어버린 경우가 많다. 집을 나눠 사는 것도 아니어서 주변에서는 문제를 눈치채기도 어렵다. 콜터 교수의 연구가 말하는 '자율성을 지키는 관계'와, 내 친구가 웃으며 말한 '그냥 남처럼 산다'는 말 사이에는 꽤 큰 거리가 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

영국에서 7년을 살면서 배운 게 있다면,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는 게 오히려 관계를 오래가게 한다는 거였다. 계좌를 나누고 취미를 따로 갖는 게 결혼의 실패가 아니라 결혼을 지속하는 방식일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문제는 '따로'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게 대화 끝에 나온 선택이냐 아니면 대화가 끊긴 결과냐다.

친구 얘기를 들으면서 남 일 같지 않았다. 나도 언젠가 아이 얘기 말고는 할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 아이 없이 둘이서만 하는 대화 시간을 만들려고 한다. 아이들은 이제 우리 없이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나이가 되어 버려, 둘이서 카페타임을 갖거나 교외 드라이브를 하기 시작했다.  또한 평상시 거창한 건 아니고, 저녁에 애 재우고 나서 그날 하루 어땠는지 딱 십 분만이라도 서로한테 묻는 거다. 그게 재정을 합치는 것보다, 성을 어떻게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참고 출처

· 60대 부부의 정서적 거리감에 관한 국내 보도 (MSN, 성장곰)
· ONS(영국 통계청) — Census 2021, People's living arrangements in England and Wales
· University College London / Rory Coulter — UK Household Longitudinal Study(UKHLS) 2011-2023 기반 LAT 연구
· The Journals of Gerontology: Series B — Living Apart Together and Older Adults' Mental Health in the UK

💍 더 읽어보기

'따로 사는 결혼'까지 가지 않아도, 영국과 한국 커플들이 반지 하나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이 온도차가 그대로 보여요.
영국은 반지에 더 진심이 되어가고, 한국은 반지의 무게를 덜어내는 중이다

결혼 자체를 하는 사람이 줄어드는 흐름은 100세 시대 계산법으로도 짚어봤어요.
영국은 결혼 밖으로, 한국은 결혼 안에서 — 100살까지 산다면 30대 결혼도 70년 프로젝트다

결혼반지, 영국은 더 진심이 됐고 한국은 더 가벼워졌다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신혼을 보내면서 7년 거주하고, 지금은 한국에서 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결혼반지를 둘러싼 영국과 한국의 온도차 이야기를 해볼게요.

몇십 년 전 나는 영국에서 결혼 반지를 안 끼고 다닌다는 이유로 자꾸 "파트너냐"는 질문을 받았던 이야기를 썼다. 영국인들은 반지를 보고 기혼·미혼을 판단하는 게 습관이 돼서, 반지가 없으면 자동으로 파트너 취급을 했다. "우리 결혼했어요"라고 정정하면 그제야 허즈번드라고 불러줬다. 그때 함께 다뤘던 게 영국 총리들이 대대로 결혼반지를 안 끼는 전통, 그리고 영국은 남자 반지 하나(웨딩밴드)에 여자는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두 개를 낀다는 차이였다.

그 후로 지금, 반지를 둘러싼 풍경이 양쪽 다 꽤 달라져 있었다.

그때 본 영국

당시 내가 본 영국은 이랬다. 사실혼 비율이 높은 만큼 반지가 "우리는 결혼했다"는 걸 증명하는 몇 안 되는 상징이라 다들 진지하게 착용했고, 남자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는 프러포즈 문화도 확고했다. 반면 한국 부부들은 결혼 초기엔 반지를 끼다가 육아가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반지를 안 끼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요즘 영국은 반지에 오히려 더 진심이다

최근 자료를 찾아보다가 흥미로운 흐름을 발견했다. 영국의 2026년 약혼반지 트렌드를 보면, 랩그로운(실험실 배양) 다이아몬드가 완전히 대세로 자리 잡았다. 천연 다이아몬드보다 저렴하다 보니 같은 예산으로 더 크고 좋은 돌을 고를 수 있게 됐고, 그 덕분에 반지 하나에 개인의 취향을 훨씬 많이 담기 시작했다. 

핀터레스트 트렌드 리포트를 보면 "타임리스한 약혼반지" 검색이 200%, "빈티지 스타일 웨딩링" 검색은 700%나 늘었다고 한다. 동서(east-west) 세팅, 서로 다른 두 보석을 함께 세팅하는 투아 에 모이(toi et moi) 스타일처럼, 예전의 뻔한 솔리테어 다이아몬드에서 벗어나 "이 반지가 우리를 어떻게 설명하는가"를 고민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더 놀라운 건 남성 약혼반지다. 판매량이 전년 대비 205%나 늘었다고 하는데, 몇 년 전 내가 봤던 "남자는 웨딩밴드 하나만" 공식이 깨지고 있는 셈이다. 유명 팝스타가 몇 년 전 약혼 발표 때 직접 약혼반지를 착용해 화제가 됐던 것도 이 흐름에 힘을 보탰다고 한다. 평균 약혼반지 가격도 1,922파운드까지 올랐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게, 이렇게 반지 산업은 화려해지는 와중에 정작 법적으로 결혼한 성인 비율은 계속 줄고 있다는 거다. 반지는 더 정성스럽고 개인화됐는데, 그 반지를 낄 결혼 자체는 줄어드는 묘한 그림이다.

한국은 반대로, 반지의 무게를 덜어내는 중이다

한국 쪽 최신 웨딩 트렌드 보고서를 보니 정반대 방향이었다. 예전엔 양가 집안의 경제력을 보여주는 다이아몬드 예물 세트가 당연했다면, 요즘은 그게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대신 그 자리를 평소에도 부담 없이 착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팬시주얼리 브랜드의 커플링이나, 명품 데일리백·시계 같은 '대안적 예물'이 채우고 있다. 예단도 이불이나 반상기 같은 현물을 아예 생략하고 간단히 현금으로 정리하는 실용주의가 자리 잡았고, 폐백과 한복을 생략하는 '전통의 쇠퇴' 현상도 뚜렷하다고 한다.

정리하면, 한국은 반지(예물) 자체를 상징에서 실용으로 옮기는 중이고, 영국은 반지를 실용에서 다시 개인적 상징으로 끌어올리는 중이다. 방향이 정확히 엇갈린다.

우리 부부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하다

재밌는 건, 우리 부부는 그때나 지금이나 반지 착용을 즐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변한 게 없다는 거다. 그때는 그게 좀 특이한 취향인 줄 알았는데, 지금 한국의 '실용주의로 가벼워진 예물' 흐름을 보니 오히려 우리가 시대를 좀 앞서갔던 건가 싶어 혼자 웃는다.

📌 참고 출처

· Queensmith (UK) — 2026 Engagement Rings Trends Report (핀터레스트 검색 트렌드 데이터 포함)
· Austen & Blake — Revealed: Engagement Ring Trends For 2026 (평균 약혼반지 가격, 남성 약혼반지 판매 증가율)
· DC Jewellery — Engagement Ring Trends UK 2025-2026
· Cullen (US) — The Rising Trend of Men's Engagement Rings
· 글픠(geulpui.com) — 2026년 대한민국 웨딩 소비 트렌드 및 산업 전망 보고서

💍 더 읽어보기

결혼반지 얘기가 나온 김에 — 그렇다면 애초에 결혼 자체는 요즘 얼마나들 하고 있을까요? 100세 시대의 계산법으로 영국과 한국의 결혼·동거 트렌드를 비교해봤어요.
영국은 결혼 밖으로, 한국은 결혼 안에서 — 100살까지 산다면 30대 결혼도 70년 프로젝트다

"아 배고파"의 "아", 영어에도 있을까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한국어의 감탄사 "아"가 영어에도 있는지 이야기해볼게요.

예전에 한국에서 영어 강사를 했던 영국인 친구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며 물어온 적이 있다. 한국인들은 배부르거나 배고플 때 꼭 "아"를 붙인다는 거였다. "아 배고파", "아 배불러"처럼. 그는 "배불러, 배고파 앞에 왜 굳이 '아'를 넣는 거야?"라고 물었는데, 나는 그때 "그냥 감정을 강조하는 감탄사 같은 거 아닐까, 영어에도 oh my god, oh dear 같은 게 있잖아"라고 두루뭉술하게 답하고 넘어갔다. 그 친구는 끝까지 이해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얼버무렸던 질문

돌이켜보면 나도 정확히는 몰랐다. 그냥 입에 붙은 습관이라고만 생각했다. "아 짜증나", "아 열받아"처럼, 한국어에서 "아"는 부정적이거나 강한 감정 앞에 반사적으로 따라붙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게 영어에도 있는 현상인지, 아니면 한국어(혹은 동아시아 언어) 특유의 습관인지는 그때 제대로 답을 못 했다.

이번엔 찾아보니, 영어에도 있긴 있었다

이번에 다시 찾아보니, 언어학에서는 이런 감탄사를 "primary interjection(1차 감탄사)"이라고 부른다. oh, ah, ugh, ouch처럼 그 자체로 감정을 툭 던지는 단어들이다. 그리고 영어에도 실제로 배고픔·배부름을 강조할 때 감탄사를 앞에 붙이는 표현이 있었다. "Oh God, I'm starving(아 진짜 배고파 죽겠어)"처럼. God이나 Jesus 같은 단어가 앞에 붙는 건 "secondary interjection(2차 감탄사)"이라고 따로 분류하는데, 원래는 다른 품사였다가 감탄사처럼 굳어진 경우다. 그러니 "배고픔 앞에 감탄사를 붙이는" 발상 자체는 영어에도 분명히 있는 셈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있었다

다만 자세히 보니 결이 다르다. 영어의 "Oh God, I'm starving"에서 "Oh God"은 뺄 수도 있고 안 뺄 수도 있는, 순전히 선택적인 강조 장치다. "I'm starving" 하나만으로도 완전한 문장이고, 감탄사는 그 위에 얹는 양념 같은 거다. 그런데 한국어의 "아 배고파"는 좀 다르다. "아"를 빼고 그냥 "배고파"라고만 해도 문법적으로는 문제없지만, 실제 대화에서는 어딘가 밋밋하고 뚝 끊긴 느낌을 준다. "아"가 있어야 오히려 자연스럽게 들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붙는 쪽에 가깝다.

정리하면, 영어는 감탄사를 "얹고 싶을 때 얹는" 방식이고, 한국어의 "아"는 "안 붙이면 오히려 어색한" 방식이라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 영국인 친구가 이해 못 했던 것도 이 지점이었을 거다. 그의 언어에서는 감탄사가 선택 사항인데, 내 언어에서는 거의 기본값처럼 붙어 있으니 신기하게 느껴졌겠지.

언어마다 감정이 앉는 자리가 다르다

몇 년이 지나 이 답을 다시 찾아보니, 그때 그 친구에게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해줄 수 있었을 텐데 싶다. 감탄사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감탄사가 문장에서 필수처럼 느껴지느냐 선택처럼 느껴지느냐의 차이였다고. 언어마다 감정을 표현하는 문법적 자리가 다르게 자리 잡혀 있다는 걸, 그 사소한 "아" 하나가 보여주고 있었던 셈이다.

📌 참고 출처

· Wikipedia — English interjections
· Oxford Bibliographies — Interjections (Linguistics)
· ESLDesk — English Interjections: Complete ESL Guide
· English Lesson via Skype — "Oh God, I'm starving" 등 배고픔 표현 예시

영국 vs 한국, 100살까지 산다면 30대 결혼도 70년 프로젝트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100세 시대를 맞아 영국과 한국의 결혼관 차이에 대해 이야기해볼게요.


몇 년 전 영어 수업에서 "스무 살은 결혼하기 좋은 나이인가"를 두고 토론한 적이 있다. 폴란드·프랑스 친구와 한 조가 됐는데, 둘 다 각자의 애인과 몇 년째 동거 중이었고, 결혼은 절대 안 할 거라고 했다. 혼인증서에 얽매이기 싫다는 거였다. 그때 나는 갓 결혼한 신혼이었고, 그 얘기를 한참 듣다가 '내가 뭔가 잘못한 건가'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워했다.

그런데 요즘 나는 그때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

그때 그 친구들의 논리

폴란드 친구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사랑해서 같이 살고 싶으면 그냥 살면 되지, 혼인증서가 뭐가 중요해? 이혼하면 이혼녀라는 딱지가 붙는 게 싫어."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결혼을 낭만이 아니라 형식으로만 보는 태도가 좀 차갑게 느껴졌었다. 그때 함께 있던 40대 스페인·터키 어른들은 오히려 스무 살 결혼에 찬성했고, 세대와 국적에 따라 입장이 완전히 갈렸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요즘 내가 하는 계산

요즘은 평균 수명 100세 시대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그 말을 곱씹다 문득 이런 계산을 해봤다. 30대에 결혼한다고 치면, 100살까지 산다는 가정 아래 앞으로 70년 가까이를 그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70년이면 결혼 자체가 인생에서 가장 긴 프로젝트가 되는 셈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아이를 낳을 계획이 없는 경우라면, 굳이 20대에 서둘러 결혼할 이유가 있을까. 30대든 40대든, 정말 확신이 설 때 결혼해도 늦지 않은 거 아닐까. 예전엔 "결혼 적령기"라는 말이 있었지만, 인생 자체가 길어진 지금은 그 적령기라는 개념도 다시 계산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찾아보니, 영국은 이미 그 계산대로 가고 있었다

이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영국은 지금 어떤지 궁금해서 최신 통계를 찾아봤는데, 정말 그 방향 그대로였다. 영국의 초혼 평균 나이는 이제 남성 34.8세, 여성 33세까지 올라갔다. 내가 그 토론 수업을 들었던 시절보다도 한참 늦어진 수치다.

더 흥미로운 건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의 위상이다. 영국 통계청 최신 자료를 보면, 법적으로 혼인·시빙파트너십 상태인 성인 비율이 처음으로 50% 아래(49.5%)로 떨어졌다. 즉 지금 영국 성인의 절반 이상이 법적으로 미혼이거나 이혼·사별 상태라는 뜻이다. 결혼한 적이 없는 사람의 비율은 10년 전 33.9%에서 지금 36.8%까지 늘었고, 혼인 없이 동거하는 인구도 590만 명에서 650만 명으로 늘었다. 변호사들은 이 흐름의 배경으로 생활비 위기와 결혼식 비용 부담을 함께 꼽았다.

몇 년 전 폴란드 친구가 혼자 유별난 소수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그 친구의 선택이 영국 사회의 다수 흐름과 꽤 가까워 보인다.

그럼 요즘 한국은 어떨까

궁금해서 한국 통계도 같이 찾아봤는데, 결혼 나이만 놓고 보면 한국도 영국과 거의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2025년 기준 초혼 평균 나이가 남성 33.85세, 여성 31.62세까지 올라왔다. 20년 전인 2000년엔 남성 29.28세, 여성 26.49세였으니, 그사이 5년 가까이 늦어진 셈이다. 영국의 34.8세·33세와 비교해도 이제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따라잡았다.

다만 한국은 영국과 다른 지점이 하나 있다. 결혼 건수 자체는 오히려 2년 연속 늘고 있다는 거다. 2024년에 이어 2025년에도 혼인 건수가 늘었는데, 특히 30대 초반 연령층에서 증가폭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즉 결혼을 아예 안 하겠다는 흐름이라기보다, 늦게 하되 결국은 하는 쪽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동거를 대하는 인식만큼은 놀랍도록 달라졌다. 최근 조사에서 "결혼 준비 과정에서의 동거는 괜찮다"는 응답이 79.4%, "결혼해서 이혼하는 것보다 동거로 먼저 결정하는 게 현명하다"는 응답이 67%나 나왔다.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에 찬성한다는 응답도 60.9%였는데, 흥미롭게도 여성(63.8%)이 남성(57.9%)보다 더 개방적이었다. 프랑스의 팍스(PACS, 결혼과 동거 사이의 법적 동반자 제도)를 참고해 비슷한 제도를 만들자는 논의까지 나오는 걸 보면, 한국도 결혼과 동거 사이의 경계가 예전만큼 뚜렷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결혼식은 올리되 혼인신고는 미루거나 아예 안 하는 부부도 늘고 있다는데, 이것도 어떻게 보면 한국식으로 변형된 '동거 같은 결혼'인 셈이다.

그때는 이상해 보였던 것이, 지금은 계산이 맞아 보인다

그때 나는 동거를 선택한 친구들 앞에서 결혼한 내가 뭔가 잘못한 것 같은 착각에 빠졌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잘못이 아니라 그냥 각자의 인생 계산이 달랐던 것 뿐이다. 100년을 산다고 치면, 언제 누구와 어떤 형태로 함께할지는 훨씬 더 다양한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결혼이든 동거든, 이제는 그 선택 자체보다 그 선택에 이르기까지의 계산이 더 중요해진 시대가 된 것 같다.

영국은 아예 결혼이라는 틀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늘고, 한국은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시기와 방식을 더 유연하게 조정하는 쪽으로 가는 것 같다. 방향은 조금 다르지만, 두 나라 모두 "정해진 나이에, 정해진 방식으로"라는 공식에서는 확실히 멀어지고 있다. 100세 시대의 계산법이 어느 나라에서든 비슷하게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인의 영어 발음 콤플렉스, 정말 나아졌을까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한국인의 영어 발음 콤플렉스가 요즘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이야기해볼게요.


몇 년 전 나는 한국인들이 유독 영어 발음에 집착하는 모습을 글로 쓴 적이 있다. 반기문 총장의 한국식 발음을 두고 외국인들은 "교양 있고 알아듣기 쉬웠다"고 평가하는데, 정작 한국인들만 발음을 지적하던 그 온도 차가 인상 깊었다. 신랑이 영국 대학에서 정치학 강의를 했을 때도 한국식 악센트 그대로였는데, 정작 그 강의를 들은 영국인 학생은 "괜찮았는데요, 왜요?"라며 신랑의 걱정을 이해 못 했던 일화도 함께 썼었다.

그때 이후로 시간이 꽤 지났으니, 요즘은 좀 달라졌을까 싶어서 다시 찾아봤다.

나아진 것처럼 보이는 부분

확실히 예전과 다른 공기가 좀 있긴 하다. 케이팝이나 한국 콘텐츠가 전 세계적으로 통하면서, 한국식 억양이 섞인 영어를 구사하는 인물들이 국제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장면을 이제 꽤 자주 본다. 발음보다 "무슨 말을 하는지", "얼마나 자신 있게 전달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언어교육 콘텐츠들도 예전보다 늘어난 느낌이다. "원어민 발음 따라잡기"보다 "일단 말하고 보자"는 식의 실용적인 접근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온라인에서 종종 보인다.

그런데 자료를 더 찾아보니,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더라

그런데 조금 더 파보니 얘기가 그렇게 깔끔하게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온라인에는 "한국인들이 발음과 강세를 무시하고 기세로만 영어를 내뱉을 때 왜 그렇게 괴롭게 들리는지"를 조음 음성학까지 동원해 진지하게 분석하는 콘텐츠가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었다. 발음 교정 전문 콘텐츠나 강의도 예전 못지않게 활발하고, 미국·영국 표준 억양을 구사하는 지원자를 고용주들이 더 선호한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발음 교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글도 최근까지 꾸준히 올라온다. 혀 수술 이야기도 여전히 한국 영어 교육을 설명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사례로 언급되고 있었다.

즉 "발음보다 소통"이라는 인식이 분명 예전보다 넓게 퍼지긴 했지만, 그게 예전의 발음 집착을 완전히 밀어낸 건 아니고, 오히려 두 가지 태도가 나란히 공존하는 것에 더 가까워 보였다. 누군가는 "발음은 상관없다"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조음 위치와 강세 패턴을 파고들며 원어민 발음을 목표로 삼는다.

자세히 보면, 그 두 부류가 누구인지 보인다

그런데 이 공존을 좀 더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패턴이 있다. 내가 보기엔 발음에 유독 목숨 거는 쪽은 정작 해외 유학 경험이 없는 부모 세대인 경우가 많다. 본인이 원어민 발음을 직접 구사해본 적이 없다 보니, 그 기준이 오히려 더 절대적이고 이상화 된 형태로 자리 잡는 것 같다. 아이 발음을 원어민처럼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정작 본인의 경험 부재 때문에 더 강해지는 아이러니랄까.

반대로 실제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은 오히려 극과 극으로 갈린다. 한쪽은 "현지에서 살아보니 발음은 정말 중요하지 않더라"며 완전히 내려놓는 쪽이고, 다른 한쪽은 오히려 그 반대다. 특히 미국 유학파 쪽에서 혀를 한껏 굴리는 발음에 더 집착하는 경향을 종종 본다. 현지에서 자신 있게 그 발음을 익힌 만큼, 돌아와서도 그걸 놓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다. 결국 발음 콤플렉스는 유학 경험의 유무보다, 그 경험을 통해 각자 무엇을 확인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굳어지는 것 같다.

그때보다 조금은 여유로워진 것 같긴 하다

그래도 하나는 분명히 달라진 것 같다. 예전엔 원어민 발음이 아니면 "영어를 못하는 것"처럼 취급받는 분위기가 강했다면, 지금은 적어도 "발음이 다가 아니다"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 정도는 됐다. 완전히 콤플렉스를 벗어던졌다기보다, 그 콤플렉스 옆에 "그래도 통하면 되지"라는 목소리가 나란히 자리를 잡은 정도랄까.

신랑의 그 정치학 강의 일화를 다시 떠올려본다. 그때 영국인 학생의 "괜찮았는데요, 왜요?"라는 반응이야말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답인 것 같다. 발음이 아니라 내용이 전달되었는지가 늘 진짜 질문이었다는 것, 그건 몇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한국인의 여름 쿨토시, 영국도 시작됐다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한국의 쿨토시 문화가 영국에서도 시작된 이야기를 해볼게요.


몇 년 전 정기적으로 만나던 영국 할머니가 한국 여행 후기를 이야기하다가 물으셨다. "한국 사람들은 왜 다들 흰장갑을 끼는 거야?" 택시 기사, 백화점 주차 안내원까지 이곳저곳에서 흰장갑을 봤는데 그 정체가 궁금했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 자외선 차단, 시인성, 서비스업의 준비된 이미지까지 세 가지 이유를 떠올려 답해드렸다.

그때 할머니께 드린 세 가지 답

정리하면 이랬다. 하나, 운전이나 등산 같은 야외 활동에서 피부가 타는 걸 막기 위해서. 둘, 주차 안내원이나 교통정리 경찰관처럼 사인을 눈에 잘 띄게 하려고. 셋, 대중교통 기사나 백화점 안내원처럼 서비스업 종사자가 준비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여기에 결혼식·장례식·단체 행사에서의 예복용 착용까지 더하면, 흰장갑은 정말 한국 어디서나 마주치는 물건이었다.

요즘 다시 생각해보니, 그 흰장갑을 잘 못 본다

그런데 최근에 이 얘기가 다시 떠올라서 찾아보다가 알았다. 요즘은 예전만큼 그 흰 면장갑을 낀 운전자를 길에서 보기가 어렵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게 있었다. 바로 쿨토시다.

여름철 운전자, 골프·등산 인구 사이에서 자외선 차단용 토시가 완전히 대세로 자리 잡았다. 요즘 나오는 제품들은 자외선 차단 지수(UPF) 50 이상을 내세우고, 봉제선 없이 매끈하게 만들어 압박 자국이 안 남는 '심리스' 방식까지 경쟁하고 있다. 손등까지 덮는 손등형, 냉감 소재를 쓴 쿨토시까지 종류도 다양해졌다. 예전에 흰 면장갑 하나로 퉁쳤던 자외선 차단이, 이제는 팔 전체를 감싸는 훨씬 전문화된 장비로 발전한 셈이다.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얇은 면장갑은 손등까지만 가려줬지, 팔뚝은 그대로 뙤약볕에 노출됐으니까. 기술이 좋아지면서 더 넓은 부위를, 더 시원하게 가릴 수 있는 대안이 나온 거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옮겨간 거다. 운전면허 학원 강사님들이 챙 넓은 모자에 팔토시, 장갑까지 중무장하고 다닌다는 얘기를 우스갯소리로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그 중무장의 구성 자체가 흰장갑에서 쿨토시로 세대교체가 된 셈이다.

그런데 영국은 어떨까 — 이제 막 시작된 이야기

할머니의 질문 자체가 "영국엔 이런 게 없다"는 전제에서 나온 거였다. 그럼 영국은 지금도 그대로일까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뜻밖에도 영국 쪽에서 작은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2026년 영국은 기록적인 더위를 겪었다. 5월에 이미 관측 사상 가장 더운 5월을 찍더니, 6월 22일엔 잉글랜드 중남부와 웨일스 일부에 '레드 익스트림 히트' 경보가 내려지고 최고 39도까지 치솟았다. 이 정도 더위는 영국인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고, 그러면서 처음으로 '운전자 자외선 노출'이 진지한 건강 이슈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특히 눈에 띈 게 "화이트 밴 탠(white van tan)"이라는 표현이었다. 매일 같은 방향으로 운전하는 배달·화물 기사들의 오른쪽 팔과 얼굴만 유독 햇볕에 그을리고 손상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인데, 피부과 전문의들이 이걸 "만성적이고 불균형한 자외선 노출"이라며 경고하고 나섰다. 자외선차단 전문 업체들과 멜라노마 자선단체들은 운전자들에게 UPF50+ 소재의 장갑이나 소매를 착용하라고 권하기 시작했고, 창문을 닫고 운전해도 자외선A는 최대 50%까지 투과된다는 연구 결과까지 근거로 들었다.

물론 아직 한국의 쿨토시처럼 대중화된 건 전혀 아니다. 관련 제품을 파는 곳도 피부과·자선단체 연계의 전문 브랜드 정도이지, 마트에서 흔히 사는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그런 걸 왜 끼냐"고 신기해하던 나라에서, 이제 "운전할 때 장갑을 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다. 자외선 노출 습관이라는 게 결국 그 나라 날씨가 만드는 거구나 싶다.

대신 흰장갑은 이제 '의식'에만 남았다

재미있는 건, 흰장갑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쓰임이 좁혀졌다는 거다. 요즘 온라인에서 흰장갑을 검색하면 대부분 "행사용", "예식용"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결혼식 부케를 받쳐 들 때, 장례식에서, 졸업식이나 단체 행사의 진행요원이 착용할 때처럼, 일상의 실용품이 아니라 격식을 갖추는 의례용 소품으로 자리가 좁혀진 거다.

예전 글에서 언급했던 도서관·박물관의 흰장갑 규정은 지금도 그대로다. 오래된 귀중 자료를 다룰 때는 여전히 흰장갑이 필수고, 반대로 손상 위험이 있는 오래된 책은 오히려 맨손으로 다뤄야 한다는 규정도 여전하다. 이 부분만큼은 시대가 바뀌어도 그대로였다.

지금 할머니가 다시 물으신다면

그때는 "한국인들은 왜 흰장갑을 끼냐"는 질문에 세 가지 이유를 댔지만, 지금 다시 그 질문을 받는다면 답이 조금 달라질 것 같다. "예전엔 그랬는데, 요즘은 운전할 때 흰장갑 대신 쿨토시를 끼고, 흰장갑은 결혼식이나 장례식처럼 격식 있는 자리에서만 봐요"라고. 그리고 이렇게 되물어보고 싶다. "그런데 할머니, 요즘 영국도 기록적인 폭염 때문에 운전자들한테 자외선 차단 장갑 끼라는 얘기가 나오던데, 거기도 곧 비슷해지는 거 아니에요?"

문화는 이렇게 조용히 옷을 갈아입는구나 싶다. 없어진 게 아니라, 자리를 옮긴 거였고, 없던 나라에도 날씨가 바뀌면 결국 비슷한 게 생기는구나 싶다.

영국 이혼률 크게 감소한 이유, 씁쓸하다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영국 이혼률이 크게 줄어든 이유를 씁쓸한 마음으로 짚어볼게요.


몇 년 전 나는 주변에 있던 영국인 부부 얘기를 신기해하며 글로 쓴 적이 있다. 이혼은 했는데 집이 도무지 안 팔려서, 어쩔 수 없이 한집에 계속 살고 있던 부부였다. 부부에서 그냥 동거인(housemate)으로 신분만 바뀐 채, 서로의 애인이 자유롭게 집을 드나드는데도 별 갈등 없이 지낸다고 했다. 그때는 그게 참 별난 사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영국 소식을 다시 찾아보다가 알았다. 그건 별난 사례가 아니라, 지금 영국을 완전히 뒤덮은 흐름의 아주 초기 버전이었다는 걸.

그때 그 부부, 사실 유행의 시작이었다

다시 떠올려보면 그 부부의 사정은 단순했다. 이혼 서류엔 도장을 찍었는데, 집을 팔 방법이 없으니 물리적으로 갈라설 수가 없었던 거다. 각자 애인을 만들고 자유롭게 연애하면서도, 주방과 거실은 계속 같이 썼다. 나는 그걸 "쿨한 영국인들의 특별한 사례" 정도로 받아들였다. 당시 글에도 썼듯, 그 시절 나는 영국인들이 감정에 참 솔직하다는 인상을 받았을 뿐, 그 이면에 있는 경제적 압박까지는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지금 영국은 아예 이 현상에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지금 영국 이혼 전문 업체들의 발표를 보면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한 온라인 이혼 서비스 업체는 이걸 아예 "조용한 이혼 위기(silent divorce crisis)"라고 부른다. 2022년 이후 실제 이혼 신청 건수가 절반 가까이 줄었는데, 이유가 부부 사이가 좋아져서가 아니라 이혼할 형편이 안 돼서라는 거다. 전문가들은 이 상황을 "너무 가난해서 헤어지지도 못한다(too broke to break up)"고 표현한다.

실제 사례들을 보면 내가 알던 그 부부와 놀랍도록 닮았다. 감정적으로는 이미 정리가 됐는데, 대출금리와 집값 때문에 물리적으로 갈라서질 못해서 "같은 부엌을 쓰면서 각자 재정 정리표를 짜는" 상황. 몇 년째 잠자리는커녕 대화도 거의 안 하면서 같은 지붕 아래 사는 부부들, 각자 방을 쓰며 아이를 함께 키우는 "한 지붕 공동육아" 사례까지 다양하게 보고되고 있었다. 한 사례자는 크리스마스 직후에 갈라섰는데, 고정금리 대출 기간이 끝나면서 결국 누구도 혼자 집을 감당할 수 없게 됐고, 3년 넘게 같은 침대는커녕 대화조차 거의 안 하며 지낸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이유는 그때도 지금도 똑같이 '돈'이다

원인은 몇 년 전 내가 썼던 그대로다. 다만 규모가 훨씬 커졌을 뿐이다. 그때는 경기 불황 정도였다면, 지금은 대출 금리가 2000년대 이후 최고 수준까지 오르고, 렌트비는 천정부지로 뛰고, 생활비 전반이 급등한 복합적 위기다. 이혼 후 두 가구를 유지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줄어든 거다. 한 이혼 전문가는 이 문제를 방치하면 불안과 갈등이 더 늘어날 거라며, 정부와 대출기관이 별거 중인 부부를 위한 더 유연한 금융 상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던 것 — 이건 웃을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몇 년 전 글을 쓸 때 나는 이 부부의 상황을 살짝 흥미로운 가십처럼 다뤘다. 자유롭게 연애하며 쿨하게 동거하는 모습에만 초점을 맞췄던 거다. 그런데 지금 자료를 보니, 이게 훨씬 무거운 이야기라는 걸 알겠다. 안전이나 건강에 위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일단 같이 지내며 돈 문제부터 정리하라고 조언하는 변호사들의 코멘트를 보면서, 이건 낭만적인 로맨틱 코미디 소재가 아니라 그냥 각자도생의 생존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소재를 다시 들여다보니, 그때는 개인의 특이한 사정으로 보였던 일이 지금은 사회 전체의 구조적 문제로 커져 있었다. 결국 이혼도, 그 이후의 삶도 감정보다 돈이 먼저 결정하는 시대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이번엔 예전처럼 가볍게만 쓸 수가 없었다.

영국, 2009년생부터는 평생 담배 못 삽니다

📅 이 글은 2026년 8월 기준, 영국 정부(GOV.UK), ASH(Action on Smoking and Health), 왕립소아과학회(RCPCH) 공식 자료를 기준으로 작성했어요.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2009년생부터 평생 담배를 못 사게 된 영국 이야기를 해볼게요.

영국에 살 때 교복 입은 어린 학생들이 학교 앞 골목에 삼삼오오 모여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여기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전자담배(베이프)를 피우는 청소년이 꽤 보이는 게 심상치 않습니다. 그 광경을 보다가 문득 영국은 지금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마침 올해 4월 정말 파격적인 법이 통과됐어요.

1. 먼저 헷갈리기 쉬운 두 가지 법부터 구분할게요

뉴스를 찾아보면 "영국 전자 담배 전면 금지"라는 제목이 여기저기 보이는데, 사실 여기엔 완전히 다른 법 두 개가 섞여 있어요. 헷갈리지 않게 먼저 정리할게요.

하나, 일회용 전자담배 금지법 (이미 시행 중) — 2025년 6월 1일부터 영국 전역(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에서 일회용 전자담배 자체의 제조·판매가 전면 금지됐어요. 이건 청소년 보호가 아니라 환경 규제(Environmental Protection Act 기반)로 시작된 법이라, 성인이든 청소년이든 상관없이 일회용 제품 자체가 아예 사라졌어요. 충전·리필 가능한 베이프는 이 금지 대상이 아니에요.

둘, Tobacco and Vapes Act (2026년 4월 왕실 재가) — 이건 청소년을 겨냥한 세대 별 금연법이에요. 일회용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2009년 1월 1일 이후 출생자는 평생 담배를 합법적으로 살 수 없게 만드는 법이고, 여기에 베이프·니코틴 제품에 대한 광고·판촉·포장 규제까지 함께 묶여 있어요.

즉 "일회용 베이프가 사라진 것"과 "청소년이 평생 담배를 못 사게 된 것"은 별개의 두 사건이 겹쳐서 하나의 큰 흐름처럼 보이는 거예요.

2. 시행 현황, 한눈에 정리

조치 시행일 핵심 내용
일회용 전자담배 전면 금지 2025.06.01 ✅ 시행 중 전 연령 대상, 제조·판매 자체 금지 (리필형은 제외)
Tobacco and Vapes Act 왕실 재가 2026.04.29 ✅ 법 통과, 세부 조항은 순차 시행
세대별 담배 판매 금지 시행일 추후 확정 2009.1.1 이후 출생자에게 담배 판매 영구 금지
미성년자 대상 베이프·니코틴 판매 확대 규제 2026.10.29 예정 무니코틴 베이프 포함 전면 판매 금지, 자판기·무료샘플·할인 금지, 대리구매 처벌
베이프액 세금(Vaping Products Duty) 2026.10 예정 베이프 액상에 별도 세금 부과
광고·후원 전면 금지 확대 2027.06.01 예정 베이프·니코틴 제품 광고, 스폰서십 전면 금지

[출처: GOV.UK · ASH · RCPCH · RakLAW Solicitors 법률 분석]

3. 왜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갔을까?

영국 정부 자료에 따르면 흡연은 영국에서 예방 가능한 사망 원인 1위로, 잉글랜드에서만 연간 6만 4천 명이 흡연 관련으로 사망해요.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정작 담배보다 더 빠르게 퍼진 게 청소년 베이핑이었어요. 14~30세 흡연율이 2023년 11.2%였는데, 정부는 이번 세대 별 금연법으로 2050년엔 이 수치를 사실상 0%까지 낮추는 게 목표라고 밝혔어요. 앞으로 5년 간 약 400만 명의 청년이, 성인 흡연자 금연 지원까지 더하면 최대 600만 명이 이 법의 영향을 받을 걸로 추산돼요. [출처: ASH]

이 법이 흥미로운 건 시행 방식이에요. 한 번에 전 국민 흡연을 금지하는 게 아니라, "이 연도 이후 태어난 사람은 평생 못 산다"는 나이 기준선을 매년 그대로 밀고 올라가는 방식이에요. 즉 2009년생이 성인이 돼도 여전히 담배를 못 사고, 그 밑의 모든 세대도 마찬가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합법적으로 담배를 살 수 있는 인구 자체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구조예요. 리시 수낵 전 총리가 처음 제안했던 정책이 정권이 바뀐 뒤에도 그대로 통과됐다는 점도 이례적이고요. 

4. 교복 입고 담배 피우던 그 아이들, 지금은 어떨까?

제가 영국에 살 때 목격했던 흡연 장면은 대부분 전통적인 담배였어요. 그런데 이번에 자료를 찾아보다가, 정부가 세대별 금연법과 별개로 베이프 규제를 이렇게까지 촘촘하게 짜 넣은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담배는 세대 기준선으로 서서히 줄여나가는 동안, 베이프가 그 자리를 대신 채우는 '풍선 효과'를 정부도 우려한 거예요. 그래서 무니코틴 베이프까지 미성년자 판매를 전면 금지하고, 자판기·무료 샘플·대리구매까지 촘촘히 막아둔 거고요.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이 풍선 효과가 남 얘기가 아니더라고요. 교복 입은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던 영국의 그 장면 대신, 요즘 한국에서는 청소년들 사이 전자담배 확산이 뉴스에 자주 오르내려요. 담배 규제가 강해질수록 더 어리고 화려하고 접근하기 쉬운 대체재로 옮겨가는 패턴은 어느 나라나 비슷한가 봐요.

5. 이 법이 실제로 뭘 바꾸나?

일반 여행자나 유학생이 체감할 부분은 크지 않아요. 다만 몇 가지는 알아두시면 좋아요.

· 영국에서 일회용 베이프 자체가 이미 사라졌어요. 여행 중 편의점에서 예전처럼 일회용 베이프를 사는 건 불가능하고, 충전식만 판매돼요.
· 2026년 10월 29일부터는 미성년자에게 무니코틴 베이프까지도 판매가 금지되니, 학부모 입장에서 자녀의 영국 유학·어학연수를 준비 중이시라면 이 규제가 실제로 청소년 베이핑 접근성을 얼마나 낮추는지 지켜볼 만해요.
· 담배·베이프 판매업체는 소매 등록·라이선스제가 도입되니, 관련 사업을 준비 중이시라면 이 부분도 확인이 필요해요.

우리나라도 영국처럼 이렇게 강력한 금연법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면서도, 설마 이게 가능할까 싶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거리에서 남녀노소 담배를 아주 자연스럽게 막 피는 모습들이 보일 때마다 눈쌀이 찌뿌려지는 건 어쩔 수 가 없네요. 

📌 오늘의 핵심 요약

✔️ 일회용 전자담배는 2025.6.1부터 전 연령 대상으로 이미 전면 금지 (환경 규제 별도 법)
✔️ Tobacco and Vapes Act는 2026.4.29 왕실 재가 — 2009년 이후 출생자는 평생 담배 구매 불가
✔️ 2026.10.29부터 미성년자 대상 베이프 규제 대폭 확대 (무니코틴 포함, 자판기·무료샘플 금지)
✔️ 2027.6.1부터 베이프·니코틴 제품 광고·후원 전면 금지
✔️ 목표: 14~30세 흡연율을 2050년까지 사실상 0%로

📌 참고 출처

· GOV.UK — Tobacco and Vapes Bill becomes law
· ASH (Action on Smoking and Health) — The Tobacco and Vapes Act / FAQ
· RCPCH — Creating a smokefree generation
· RakLAW Solicitors — Tobacco and Vapes Act 2026 시행일 분석

영국여행 숙박세(관광세) 2026 총정리

📅 이 글은 2026년 8월 기준, 스코틀랜드 정부(Visitor Levy (Scotland) Act), 웨일스 정부(Senedd), 그리고 각 지방의회(City of Edinburgh Council 등) 공식 발표 자료를 기준으로 작성했어요. 숙박세는 내무부(Home Office) 소관이 아니라 지방정부·지자체 권한 사항이라, 이 글에서도 그 기준으로 출처를 표기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영국 여행 숙박세(관광세)를 2026년 기준으로 총정리해볼게요.

솔직히 저도 처음엔 "영국은 물가도 비싼데 세금을 또 뗀다고?" 하고 약간 당황했어요. 제가 브리스톨과 캔터베리에 살던 시절엔 숙박세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거든요.

근데 영국 지방정부 발표와 스코틀랜드·웨일스 소식을 뜯어보니, 2026년 7월 에든버러를 시작으로 영국 전역에 숙박세(Overnight Visitor Levy)가 지역별로 차례차례 도입되고 있더라고요. 런던도 시장(Mayor) 권한으로 도입을 검토 중이라, 영국 여행이나 출장, 유학 사전 탐방을 준비 중이시라면 이제 숙박 예산을 짤 때 이 세금을 꼭 따로 계산하셔야 해요.

7년 동안 영국에서 살면서 현지 물가와 정책 변화를 몸소 겪어본 시선으로, 어느 지역에서 얼마가 추가되는지, 여행 경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핵심만 정리해드릴게요.

1. 영국 숙박세, 왜 갑자기 생겼나

영국은 그동안 파리·암스테르담·바르셀로나 같은 유럽 주요 도시들과 달리 관광세가 없는 나라였어요. 그런데 에든버러의 경우 2023년 한 해에만 관광객이 500만 명 가까이 다녀가며 22억 파운드를 썼는데, 정작 그 관광객들이 몰고 오는 도로·쓰레기·공공서비스 부담을 감당할 재원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오랫동안 제기돼왔어요. 에든버러 시의회는 이번 숙박세로 연간 최대 5,000만 파운드를 걷어 공공서비스와 문화·유산 인프라에 재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어요. [출처: City of Edinburgh Council]

즉 이건 국가 단위의 세금이 아니라 지방정부가 자체적으로 도입하는 지역 단위 부담금이에요. 그래서 지역마다 시행 여부, 시행일, 세율이 다 달라요.

2. 지역별 확정 현황, 한눈에 보기

지역 상태 시행일 세율/방식
에든버러 ✅ 확정 2026.07.24 숙박비의 5%, 5박까지만 부과 (그 이후는 면제)
글래스고 ✅ 확정 2027.01.25 숙박비의 5%, 체류 전체 기간에 부과 (일수 제한 없음)
웨일스 전역 ⚠️ 등록 의무화 2026년 가을(등록) / 2027.04(부과 예정) 숙박업체는 세율 도입 여부와 무관하게 가을까지 의무 등록, 지자체별로 1박당 약 £1.30 수준 부과 검토
맨체스터 ✅ 시행 중 (성격 다름) 2023년부터 객실당 £1 — 법정 숙박세가 아니라 업계 자율 조직 ABID의 부담금
런던 ⏸️ 검토 중 미정 시장(Mayor) 권한으로 도입 논의 중, 아직 확정 아님
잉글랜드 기타 도시 ⏸️ 대기 2027~2028년 이후 전망 지방분권법(Devolution Bill)이 상원 통과 중, 법적 근거 마련이 우선

[출처: City of Edinburgh Council 공식 발표 · Visitor Levy (Scotland) Act 2024 · GOV.Wales · Chekin 업계 리포트]

3. 에든버러 — 가장 먼저, 가장 확실하게 시작됩니다

7월 24일부터 에든버러 전역에서 호텔, B&B, 게스트하우스, 셀프케이터링, 호스텔, 캠핑장, 심지어 한곳에 정박한 보트·캐러밴까지 거의 모든 유상 숙박에 5% 숙박세가 붙어요. VAT 미만 소규모 업체도 예외 없이 적용 대상이고요.

몇 가지 꼭 알아두실 점이 있어요.

5박까지만 부과돼요. 열흘을 묵어도 세금은 5박 치만 내면 돼요.
VAT(부가세) 전 금액 기준이라, 식사·주차·교통 같은 부가 비용에는 안 붙어요.
거주자도 예외가 아니에요. 관광객뿐 아니라 출장자, 그리고 스코틀랜드·영국 거주자가 에든버러에서 유상 숙박을 해도 똑같이 부과돼요.
2025년 10월 1일 이후 결제된 예약부터 적용이라, 이미 그 이후 예약하셨다면 체크인이 7월 24일 이후일 경우 세금이 붙어요.

간단히 계산해보면, 1박에 150파운드짜리 호텔이라면 하루 7.5파운드, 5박을 채워도 최대 37.5파운드 정도가 추가되는 수준이에요. 크지는 않지만 여러 명이 여러 박 묵는 가족여행이나 어학연수 사전답사라면 무시 못 할 금액이죠.

4. 글래스고 — 에든버러보다 조건이 더 셉니다

2027년 1월 25일부터 시작되는 글래스고의 숙박세는 에든버러와 세율(5%)은 같은데, 결정적으로 5박 상한이 없어요. 즉 열흘을 묵으면 열흘 전체에 세금이 붙는다는 뜻이에요. 장기 출장이나 어학연수처럼 체류 기간이 긴 분들은 이 차이를 꼭 기억해두세요.

유학생은 내야 하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정규 재학생이 학교 기숙사나 학교 계약 학생 숙소에 학기 중 정상적으로 거주하는 경우는 대상이 아니에요. 같은 틀(Visitor Levy (Scotland) Act 2024)로 시행되는 에든버러 규정을 보면, 적용 대상 숙박에 "student lets"가 포함되긴 하지만 "방문객 및 그 도시 소속이 아닌 학생에게 임대되는 경우에 한함"이라는 단서가 붙어요. 즉 '거주'는 과세 대상이 아니고, '단기 방문 숙박'만 과세 대상이라는 원칙이에요. 글래스고도 같은 법 틀 안에서 시행되는 만큼 이 원칙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요.

다만 이렇게 걸리는 경우가 있어요.

· 방학 중 비는 기숙사가 관광객이나 타교 학생에게 단기 재임대되는 경우 (묵는 사람이 부담)
· 학생이 본인 학교가 있는 도시가 아닌 곳으로 여행을 가서 호텔·호스텔에 묵는 경우 — 이건 그냥 일반 여행자와 동일하게 과세돼요
· 학교 기숙사가 아니라 일반 프라이빗 렌트(월세)는 애초에 '숙박업'이 아니라 임대차라 대상이 아니에요

정리하면, 글래스고에 정식 재학하며 학기 중 기숙사에 사는 유학생 본인은 숙박세 대상이 아니지만, 다른 도시로 여행 가거나 방학 중 남는 방을 단기로 빌리는 경우엔 얘기가 달라져요. 다만 글래스고의 정확한 예외 조항은 아직 에든버러만큼 세부적으로 공개되지 않았으니, 입학 예정 대학이 확정되면 학교 Accommodation 부서에 직접 확인하시는 게 가장 정확해요.

5. 웨일스 — 세금보다 '등록'이 먼저입니다

웨일스는 조금 결이 달라요. 2025년 9월 관련법(Visitor Accommodation (Register and Levy) Etc. (Wales) Act 2025)이 왕실 재가를 받았는데, 이 법은 두 가지를 따로 규정해요.

등록 의무 (전 지역 공통): 웨일스의 모든 숙박업체는 2026년 가을까지 웨일스 국세청(Welsh Revenue Authority)에 의무 등록해야 해요. 이건 각 지자체가 실제로 숙박세를 도입하든 안 하든 무조건 해당돼요.
숙박세 (지자체 재량): 실제 세금 부과는 지자체가 개별적으로 결정하는 선택 사항이고, 가장 빨라도 2027년 4월 이후예요.

여행자 입장에서는 아직 당장 부담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2027년부터는 웨일스 쪽 지자체도 하나둘 숙박세를 도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정도만 기억해두시면 돼요.

6. 맨체스터 — 이건 '숙박세'가 아니라 다른 제도예요

맨체스터는 이미 2023년부터 객실당 1파운드를 걷고 있는데, 이건 에든버러·글래스고와 법적 성격이 완전히 달라요. 정부가 부과하는 법정 숙박세가 아니라, 그 지역 숙박업체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ABID(Accommodation Business Improvement District)라는 민간 자율 기구가 걷는 부담금이에요. 다른 잉글랜드 도시들도 이 방식을 참고해 비슷한 자율 부담금을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법정 숙박세와 헷갈리지 않으셔야 해요.

7. 런던과 잉글랜드 나머지 지역 — 아직 확정된 건 없습니다

런던은 시장 권한으로 도입을 검토 중이지만,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공식 확정된 세율이나 시행일은 없어요. 잉글랜드의 다른 도시들도 지방분권법이 상원을 통과해야 법적 근거가 생기는 단계라, 실제 도입은 빨라야 2027~2028년으로 전망돼요. 런던 여행을 앞두고 계신 분이라면 아직은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되지만, 법안 통과 소식은 종종 확인해두시는 게 좋아요.

8. 여행 경비에는 실제로 얼마나 영향을 줄까

지금 확정된 건 에든버러 하나뿐이라, 당장 큰 충격은 없어요. 다만 스코틀랜드 여행을 계획 중이시라면 이렇게 준비하세요.

✔️ 에든버러 숙박 예약 시 총액에 5%가 별도로 붙는지 예약 사이트에서 확인
✔️ 5박 이상 체류라면 6박째부터는 세금이 안 붙는다는 점 활용해 일정 조율 가능
✔️ 2027년 이후 글래스고·웨일스 여행 계획이 있다면 지역별로 세율 재확인
✔️ 예약은 취소 정책과 함께 확인 — 세금 부과 기준일(예약일이 아니라 결제일)이 지역마다 다름

(여행 전 미리 확인해야 할 다른 것들은 영국 ETA/EU EES/ETIAS 글에서도 다뤘어요.)

9. 그리고 사실, 이게 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

제가 브리스톨·캔터베리에 살던 시절엔 숙박세 얘기 자체가 없었어요. 영국은 늘 "유럽에서 관광세 없는 몇 안 되는 나라"로 여겨졌거든요. 그런데 몇 년 사이 관광객 수는 계속 늘고, 지자체 재정은 팍팍해지면서 결국 유럽 대부분 도시들이 이미 하던 방식을 영국도 뒤늦게 따라가는 모양새예요. 파리·암스테르담은 이미 오래전부터 걷던 세금인데, 영국이 이제야 첫발을 뗀 셈이죠.

📌 오늘의 핵심 요약

✔️ 에든버러: 2026.7.24부터 숙박비 5%, 최대 5박까지만 부과 (확정)
✔️ 글래스고: 2027.1.25부터 숙박비 5%, 박수 제한 없이 전체 부과 (확정)
✔️ 정규 재학생이 학기 중 학교 기숙사에 거주하는 건 과세 대상 아님 (타지 여행·방학 재임대는 별개)
✔️ 웨일스: 2026년 가을까지 숙박업체 등록 의무화, 실제 세금은 2027.4 이후 지자체 재량
✔️ 맨체스터의 £1 부담금은 법정 숙박세가 아니라 민간 ABID 제도
✔️ 런던·잉글랜드 나머지 지역: 아직 미확정, 최소 2027~2028년 전망
✔️ 거주자·출장자도 예외 없이 적용 (관광객 한정 아님)

📌 참고 출처

· City of Edinburgh Council — Visitor Levy 공식 안내
· Visitor Levy (Scotland) Act 2024 원문
· GOV.Wales — Visitor Accommodation (Register and Levy) Etc. (Wales) Act 2025
· Chekin — England Tourist Tax 2026 업계 분석
· Time Out UK · Pure Magazine — 지역별 시행 현황 보도

영국 말차 음료가 너무 먹고 싶다 (13년 전엔 반대였다)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영국 말차 음료가 사무치게 그리워진 이야기를 해볼게요.


어젯밤 나는 인스타그램을 넘기다가 손가락이 멈췄다. 내가 석사 학위를 했던 영국 Bristol Blank Street라는 카페에서 찍은 스트로베리 말차 사진이었다. 연분홍과 진초록이 그러데이션으로 층을 이룬, 보기만 해도 시원한 그 한 잔. 순간 나는 정말 진지하게 항공권 검색창을 열 뻔했다.

그리고 곧바로 나 이 감정, 예전에도 느껴본 적 있는데. 방향만 정반대로.

2013년, 나는 반대 방향으로 그리워했다

영국에 살던 시절 나는 녹차에 환장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 영국 베이커리에는 녹차 가루로 만든 것 자체가 없었다. 여름이면 한국 친구들이 SNS에 올리는 녹차 빙수, 녹차 프라푸치노, 녹차 케이크 사진을 보면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싶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녹차 비슷한 색이라는 이유로 피스타치오나 민트로 아쉬움을 달래던 게 그 시절 나였다. 가끔씩은 엄마에게 녹차 가루를 보내 달라고 SOS를 치기도 했다.

한번은 녹차 케이크를 먹겠다고 런던까지 원정을 간 적도 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어느 베이커리에서 파는 녹차 케이크 하나를 먹겠다고, 아메리카노 한 잔과 함께 그 케이크를 몇 입 만에 해치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카롱이며 다른 케이크들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예뻤는데, 그 많은 것 중에서도 결국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딱 하나, 초록빛 그 조각이었다. 그만큼 그때 영국에서 녹차는 정말 희귀한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은 정반대다

그런데 이번엔 한국에 있는 내가, 영국 소식을 보며 못 먹어서 억울해 하고 있다. 몇 년 사이 영국은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내 눈길을 사로잡은 그 Blank Street라는 카페, 알고 보니 원래 브루클린에서 시작해서 몇 년 전 런던에 처음 문을 열었는데, 지금은 런던은 물론 맨체스터, 버밍엄, 에든버러, 글래스고까지 매장이 40곳 넘게 퍼졌다고 한다. 세이지그린 색깔의 매장 간판이 특징이고, 커피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도 정작 매출의 절반가량이 말차 음료에서 나온다니, 사실상 말차 전문점이나 다름없다. 대형 커피 체인마다 말차 라떼가 기본 메뉴로 자리 잡았고, 요즘은 그냥 말차도 아니고 스트로베리 말차처럼 응용 버전까지 유행이라고 한다. 그 배경에 뭐가 있는지는 예전에 다른 글(영국 말차 열풍)에서 보면 되지만, 지금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니라 순전히 내 억울함에 관한 거니까.

억울함의 정체 — 나는 10년 넘게 그 물결을 놓쳤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 타이밍이 참 아쉽다. 계산해보니 내가 그 녹차 케이크 글을 쓰던 2013년과 지금 사이엔 무려 10년이 넘는 시간이 있다. 짧게 스쳐 지나간 유행이 아니라, 그 오랜 세월 영국은 계속 '말차 없는 나라'였다가 최근에야 완전히 뒤집힌 거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영국에서 녹차 음료를 실컷 즐길 기회를 통째로 놓쳐버린 셈이다. 조금만 늦게 태어났거나, 그 때 좀 더 나중까지 영국에 머물렀더라면 나도 그 카페 어딘가에서 스트로베리 말차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을텐데. 하필 내가 그 나라에 있던 시절이 '말차 없는 영국'의 거의 전 기간과 겹친다는 게, 생각할수록 아깝다. 

즘 한국 카페의 말차 음료를 볼 때마다 나는 시큰둥하게 그거 나 다 마셔봐서 그런지 시시하다. 그런데 영국의 스트로베리 말차는 다르다. 그건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절의 영국, 내가 놓친 그 나라의 지금이다. 같은 말차인데도 이렇게 마음이 다르게 움직이는 게 신기하다. 아마 한국의 말차는 내가 이미 아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익숙한 유행이고, 영국의 말차는 내가 살았지만 더는 모르는 나라의 낯선 오늘이라서 그런 것 같다.

2013년의 나는 한국의 녹차 빙수를 그리워하며 민트로 버텼다. 2026년의 나는 영국의 스트로베리 말차를 그리워하며 인스타그램만 들여다본다. 두 그리움의 방향은 정반대지만, 결국 같은 마음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벌어지는 맛있는 일들에 대한 순수한 아쉬움. 다음에 영국에 갈 일이 생기면, 관광지도 쇼핑도 다 제쳐두고 제일 먼저 Blank Street부터 찾아가 스트로베리 말차를 한 잔 마시러 갈 생각이다. 그런데 그 때에도 스트로베리 말차는 있겠지? ㅎㅎ 

🍵 더 읽어보기

왜 하필 지금 영국에서 말차가 뜬 걸까요? 소버 큐리어스, L-테아닌, 가심비 — 세 가지 이유를 직접 다 마셔보고 파헤쳤어요.
영국 말차 열풍 — 소버 큐리어스, L-테아닌, 가심비

영국 HPI 비자 완전정복 - 국내 대학 출신도 가능하다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국내 대학 출신도 가능한 영국 HPI 비자를 제대로 정리해볼게요.

2026 영국 비자 변경 총정리 글에서 HPI 비자는 표 한 줄, "영어 요건 B1→B2"로만 짧게 다루고 넘어갔어요. 그런데 자료를 더 파보니, HPI 비자는 그 한 줄로는 설명이 안 될 만큼 구조 자체가 크게 바뀌어 있더라고요. 대학 리스트가 두 배로 늘었고, 2022년 이 비자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연간 캡까지 생겼습니다. 오늘은 HPI 비자만 따로 떼어서 제대로 정리해드릴게요.

1. HPI 비자가 뭔가요

HPI(High Potential Individual) 비자란, 해외 명문대를 졸업한 사람이 회사의 스폰서십이나 job offer 없이 영국에서 자유롭게 일하거나 구직 할 수 있는 비자예요. 학사·석사는 2년, 박사는 3년 간 체류할 수 있고, 업종이나 직무 제한도 없습니다. 2022년 5월, 브렉시트 이후 글로벌 인재를 끌어오려는 취지로 신설된 루트예요.

⚠️ 이 비자는 해외(비영국) 대학 졸업자 전용이에요. 영국 대학을 졸업하셨다면 리스트에 춣신 학교 이름이 있어도 자격이 안 되고, Graduate Visa 쪽을 보셔야 해요.

2. 2026년, 세 가지가 한꺼번에 바뀌었습니다

변경 사항 시행일 핵심 내용
대학 리스트 확대 2025.11.04 ✅ 42개교 → 80개교로 두 배 확대, 최근 5년치 소급 적용
연간 캡 신설 2025.11.04 ✅ 최초로 연 8,000건 상한 도입 (11/1~10/31 회계연도)
영어 요건 B1→B2 2026.01.08 ✅ 신규 신청자 전원 CEFR B2 이상 필수

[출처: Sterling Law · DavidsonMorris · GOV.UK Global Universities List]

3. 대학 리스트, 42개교에서 80개교로

가장 큰 변화는 자격 대학 리스트예요. 기존엔 top 50 랭킹 대학 중 약 42개교만 인정됐는데, 이제 top 100 랭킹까지 확대되면서 리스트가 80개교로 늘었어요. QS·THE·ARWU 세 개 랭킹 중 2개 이상에서 top 100에 든 대학이 기준이고, 이 확대는 최근 5년 이내 졸업자에게 소급 적용됩니다. 즉 몇 년 전엔 리스트에 없어서 자격이 안 됐던 대학 졸업자도, 지금은 새로 신청할 수 있을 수 있어요.

다만 세 가지는 꼭 확인하세요.

하나, 리스트는 매년 새로 발표되고 연도 별로 다릅니다. 졸업한 '연도'의 리스트 기준으로 판단해야지, 지금 연도의 리스트를 보면 안 돼요. 졸업 시점 기준 리스트는 GOV.UK 공식 페이지에서 연도 별로 확인할 수 있어요.

둘, 영국 대학은 절대 포함되지 않습니다. HPI는 애초에 '해외' 명문대 졸업자를 위한 루트라, 영국 대학 졸업자는 리스트에 있어도 자격이 안 돼요.

셋, 리스트가 미국 대학 위주라는 점도 알아두세요. 80개교 중 절반 가까이가 미국 대학이고, 남반구 대학은 호주 몇 곳을 빼면 거의 없어요.

🇰🇷 한국 대학은 어떻게 되나요?

2025.11~2026.10 학위 수여자용 최신 리스트에는 연세대학교(Yonsei University)가 유일한 한국 대학으로 올라 있어요. 중요한 건 이 명단이 매년 바뀐다는 점이에요 — 어느 해엔 다른 한국 대학이 포함되기도 하고, 전년도에 있던 학교가 랭킹 변동으로 빠지기도 해요. 그러니 "한국 대학이니까 당연히 포함"이라고 넘겨짚지 마시고, 본인의 졸업(학위 수여) 연도 기준 리스트에 재학·졸업 대학이 실제로 있는지 GOV.UK에서 매번 직접 확인하세요.

4. 연간 캡 8,000명 — 아직은 여유 있지만

2022년 이 비자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연 8,000건 상한이 생겼어요. 회계연도는 11월 1일부터 다음 해 10월 31일까지이고, 캡을 넘긴 신청은 대기 없이 그냥 무효 처리돼서 다음 연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다만 너무 겁먹지 않으셔도 되는 게, 최근 발표된 통계로는 연간 실제 발급 건수가 2,000건 조금 넘는 수준이었어요. 8,000명 캡의 4분의 1 정도만 채워지고 있는 셈이라, 당장 캡이 실질적인 병목이 될 가능성은 낮아 보여요. 그래도 대학 리스트가 두 배로 늘면서 신청 가능 인구 자체가 늘었으니, 회계연도 막바지(9~10월)에 몰아서 신청하는 건 피하시는 게 안전합니다. (미리미리 신청하세요)

5. 영어 요건 B2 — "학위 있으니 무난"이 아닙니다

2026년 1월 8일부터 신규 신청자는 CEFR B2 이상을 증명해야 해요. 여기서 흔한 오해가 하나 있어요 — "대학원 이상 학위가 있어도 영어 요건은 자동 통과"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면제 조건은 학위 소지가 아니라 "영어로 가르친 학위"이고, 이걸 Ecctis라는 기관의 QLS(학위 동등성) 인증서로 별도 증빙해야 해요. 한국어로 진행된 국내 대학원 학위라면, 아무리 명문대 리스트에 있어도 이 면제 조건에는 안 걸려요.

B2를 증명하는 방법은 세 갈래예요.

① 영어로 진행된 학위 + Ecctis 인증 → 시험 없이 통과
② 영어권 국적자 → 시험 없이 통과
③ 위 두 가지에 해당 안 되면 → 공인 SELT 시험 응시 필요

한국 대학(원) 졸업자 대부분은 ③에 해당해요. 해외 응시자는 Pearson, PSI, IELTS SELT Consortium, LanguageCert 중 하나로 봐야 하고, HPI는 UKVI 지정 SELT만 인정하니 일반 아카데믹 IELTS 점수가 있어도 그대로 인정되지 않을 수 있어요. B2 자체(IELTS 5.5~6.5 상당)는 대학원 이상이면 리딩·리스닝은 여유 있게 넘는 경우가 많지만, 실무에서 영어를 안 쓰신 분들은 스피킹·라이팅에서 걸리는 사례가 꽤 있으니 최소 한 달 전엔 준비하시길 권해요.

6. 실전 체크리스트

HPI 신청을 준비 중이시라면 이 항목들을 순서대로 확인하세요.

✔️ 졸업 대학이 졸업 연도 기준 GOV.UK 리스트에 있는가
✔️ 졸업 후 5년 이내인가
✔️ 영어 B2 증빙을 준비했는가 (SELT/영어학위+Ecctis/국적)
✔️ 신청 수수료 £880 + IHS(석사 £2,070, 박사 £3,105선) 준비
✔️ £1,270을 28일 연속 보유했는가 (영국 내 12개월 이상 합법 체류 시 면제)
✔️ 회계연도(11월~10월) 초반에 신청하는 게 유리

수수료 £880은 4월 인상 때도 예외적으로 오르지 않은 항목이에요. IHS와 생체인식 비용은 별도입니다.

7. 아이러니 하나 — 영국 졸업생은 오히려 손해를 봤어요

이번 개편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하나 있어요. 영국 대학 유학생의 Graduate Visa는 2027년부터 2년에서 18개월로 단축되는데, 해외 명문대 졸업생을 위한 HPI는 오히려 문이 넓어졌어요. 영국에서 직접 공부하고 학비를 낸 유학생의 체류 기간은 줄고, 해외에서 졸업장만 딴 사람에게는 기회가 늘어난 셈이라, 영국 내에서도 형평성 논란이 나오고 있어요.

📌 오늘의 핵심 요약

✔️ HPI 대학 리스트: 42개교 → 80개교, 최근 5년 소급 적용, 영국 대학은 대상 아님
✔️ 2025~2026 리스트의 한국 대학은 연세대학교 유일 — 명단은 매년 변경, 졸업 연도 기준 재확인 필수
✔️ 연간 캡 8,000건 신설 (11/1~10/31), 실제 수요는 아직 2,000건대라 여유 있음
✔️ 영어 요건 B1→B2 — 학위 소지가 아니라 '영어로 가르친 학위'만 면제, 대부분 SELT 별도 응시 필요
✔️ 수수료 £880은 4월 인상에서 예외적으로 동결
✔️ 아이러니: 영국 유학생 Graduate Visa는 단축, 해외 명문대 HPI는 확대

📌 참고 출처

· GOV.UK — High Potential Individual visa: global universities list
· Sterling Law — High Potential Individual Visa 2026 가이드
· DavidsonMorris — HPI Visa Guide
· Vanessa Ganguin Immigration Law — HPI visa expansion 분석

영국 부부도 이제 따로 잔다 — '슬립 디보스' 시대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영국 부부들 사이에 퍼지는 '슬립 디보스' 트렌드를 이야기해볼게요.


몇 년 전 나는 그해 영국 구글 인기 검색어에 올랐던 "스푸닝(spooning)"이라는 단어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숟가락 두 개를 포개듯, 뒤에서 꼭 껴안고 자는 자세 말이다. 그때 나는 신랑의 넓은 등에 딱 붙어야 잠이 온다며, 부부라면 이렇게 붙어 자는 게 사랑의 증거라는 식으로 은근히 예찬했었다. 영국 매체는 그 유행이 왜 그해 갑자기 생겼는지 미스터리라고 했지만, 나는 그냥 다들 스푸닝의 매력을 뒤늦게 알아챈 거라고 혼자 결론 내리며 신나서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최근에 영국 얘기를 다시 찾아보다가, 완전히 다른 흐름을 발견했다. 요즘 영국에서 뜨는 단어는 스푸닝이 아니라 "슬립 디보스(sleep divorce)"였다.

예전엔 붙어 자는 게 사랑이라 썼는데

그때 글에서 나는 스푸닝이 불편해도 좋다고, 체온을 느끼고 친밀감이 쌓이는 기분이 든다고 썼다. 실제로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신랑 등에 붙어야 잠이 잘 온다. 다만 밤새 그 자세를 유지하지는 못하고, 몇십 분 지나면 결국 편한 자세로 돌아간다는 것도 그때와 똑같다. 팔이 저려서 위로 뺐다 아래로 넣었다 하던 그 시절의 고민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요즘 영국은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한다

최근 영국 조사를 보니, 함께 사는 커플 중 약 15%가 이제 각방에서 잔다고 한다. 그중 90% 가까이가 아예 다른 방에서 자는 걸 택했다. 가장 큰 이유는 단연 코골이였다. 재미있는 건 55세 이상에서 이 비율이 훨씬 높다는 거다. 나이가 들수록 각방을 쓰는 경향이 뚜렷해진다는 얘기인데, 예전엔 각방이 부부 사이가 멀어졌다는 신호로 여겨졌다면, 요즘은 오히려 숙면을 위한 현명한 선택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었다.

완전히 갈라서는 대신 절충안을 택하는 커플도 늘고 있다. 침대는 같이 쓰되 이불만 각자 따로 덮는 방식인데, 원래 북유럽에서는 흔했던 방식이 이제 영국에서도 퍼지고 있다고 한다. 서로의 뒤척임에 방해받지 않으면서도 한 침대에 눕는다는 상징성은 지키는, 딱 중간 지점인 셈이다.

한국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한국을 보면 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나이가 들수록 따로 자고 싶어 하는 부부가 늘어난다는 점은 영국과 비슷한데, 그 이유가 코골이보다는 그냥 각자의 숙면 습관과 사생활을 존중하고 싶다는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주변만 봐도 자녀가 다 크고 나면 각자 방에서 편하게 자는 부부가 꽤 많고, 그걸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반면 아이가 태어나면 완전히 다른 국면이 펼쳐진다. 부부가 각방을 고민하기는커녕, 오히려 아이와 한 침대에서 자는 이른바 co-sleeping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 부부의 취침 자세보다 부모와 아이의 취침 자세가 더 중요한 화두가 되는 거다. 결국 한국에서는 '누구와 자느냐'의 기준이 부부 관계가 아니라 아이의 유무에 따라 크게 흔들리는 것 같다. 아이가 어릴 땐 셋이 붙어 자다가, 아이가 크면 이번엔 부부가 각자 떨어지는, 말하자면 시기별로 계속 재배치되는 구조랄까.

이렇게 트렌드를 훑어보고 나니, 몇 년 전 내가 쓴 글이 새삼 다르게 읽힌다. 그때는 스푸닝이 정답인 것처럼 썼는데, 지금 보니 그건 그냥 그 시기 우리 부부에게 맞았던 방식이었을 뿐이다. 영국도 예전엔 붙어 자는 게 당연했다가 지금은 각방이 현명한 선택으로 재평가받는 걸 보면, 결국 정답은 없고 그때그때 맞는 방식만 있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우리도 언젠가 슬립 디보스나 이불 분리 쪽으로 옮겨갈지도 모르겠다. 다만 아직은 신랑 등에 붙어야 잠이 오는 걸 보면, 나는 당분간 스푸닝파로 남을 것 같다.

— '슬립 디보스' 시대 — 블로그스팟 발행용 HTML 사용법: 블로거 글쓰기 → HTML 보기 모드에 전체 붙여넣기 * 생활 에세이라 심플 스타일: 신뢰도 박스 없음, 장식은 최소화 발행 전 할 일: 1) 맞춤링크: uk-korea-couples-sleeping-apart-trend / 라벨: 영국생활문화 2) 사진: 직접 찍은 사진이 있으면 삽입, 없으면 텍스트만 발행 3) 메타 설명(검색 설명): 몇 년 전 나는 영국의 인기 검색어 '스푸닝'을 소개하며 부부는 꼭 붙어 자야 제맛이라고 썼다. 그런데 요즘 영국은 정반대 얘기를 한다. '슬립 디보스'라는 트렌드로 각방을 쓰는 부부가 늘고 있다는 것. 한국은 나이 들수록, 아이가 생길수록 어떻게 달라질까. ============================================ -->

몇 년 전 나는 그해 영국 구글 인기 검색어에 올랐던 "스푸닝(spooning)"이라는 단어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숟가락 두 개를 포개듯, 뒤에서 꼭 껴안고 자는 자세 말이다. 그때 나는 신랑의 넓은 등에 딱 붙어야 잠이 온다며, 부부라면 이렇게 붙어 자는 게 사랑의 증거라는 식으로 은근히 예찬했었다. 영국 매체는 그 유행이 왜 그해 갑자기 생겼는지 미스터리라고 했지만, 나는 그냥 다들 스푸닝의 매력을 뒤늦게 알아챈 거라고 혼자 결론 내리며 신나서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최근에 영국 얘기를 다시 찾아보다가, 완전히 다른 흐름을 발견했다. 요즘 영국에서 뜨는 단어는 스푸닝이 아니라 "슬립 디보스(sleep divorce)"였다.

예전엔 붙어 자는 게 사랑이라 썼는데

그때 글에서 나는 스푸닝이 불편해도 좋다고, 체온을 느끼고 친밀감이 쌓이는 기분이 든다고 썼다. 실제로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신랑 등에 붙어야 잠이 잘 온다. 다만 밤새 그 자세를 유지하지는 못하고, 몇십 분 지나면 결국 편한 자세로 돌아간다는 것도 그때와 똑같다. 팔이 저려서 위로 뺐다 아래로 넣었다 하던 그 시절의 고민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요즘 영국은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한다

최근 영국 조사를 보니, 함께 사는 커플 중 약 15%가 이제 각방에서 잔다고 한다. 그중 90% 가까이가 아예 다른 방에서 자는 걸 택했다. 가장 큰 이유는 단연 코골이였다. 재미있는 건 55세 이상에서 이 비율이 훨씬 높다는 거다. 나이가 들수록 각방을 쓰는 경향이 뚜렷해진다는 얘기인데, 예전엔 각방이 부부 사이가 멀어졌다는 신호로 여겨졌다면, 요즘은 오히려 숙면을 위한 현명한 선택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었다.

완전히 갈라서는 대신 절충안을 택하는 커플도 늘고 있다. 침대는 같이 쓰되 이불만 각자 따로 덮는 방식인데, 원래 북유럽에서는 흔했던 방식이 이제 영국에서도 퍼지고 있다고 한다. 서로의 뒤척임에 방해받지 않으면서도 한 침대에 눕는다는 상징성은 지키는, 딱 중간 지점인 셈이다.

한국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한국을 보면 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나이가 들수록 따로 자고 싶어 하는 부부가 늘어난다는 점은 영국과 비슷한데, 그 이유가 코골이보다는 그냥 각자의 숙면 습관과 사생활을 존중하고 싶다는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주변만 봐도 자녀가 다 크고 나면 각자 방에서 편하게 자는 부부가 꽤 많고, 그걸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 반면 아이가 태어나면 완전히 다른 국면이 펼쳐진다. 부부가 각방을 고민하기는커녕, 오히려 아이와 한 침대에서 자는 이른바 co-sleeping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다. 부부의 취침 자세보다 부모와 아이의 취침 자세가 더 중요한 화두가 되는 거다. 결국 한국에서는 '누구와 자느냐'의 기준이 부부 관계가 아니라 아이의 유무에 따라 크게 흔들리는 것 같다. 아이가 어릴 땐 셋이 붙어 자다가, 아이가 크면 이번엔 부부가 각자 떨어지는, 말하자면 시기별로 계속 재배치되는 구조랄까.

이렇게 트렌드를 훑어보고 나니, 몇 년 전 내가 쓴 글이 새삼 다르게 읽힌다. 그때는 스푸닝이 정답인 것처럼 썼는데, 지금 보니 그건 그냥 그 시기 우리 부부에게 맞았던 방식이었을 뿐이다. 영국도 예전엔 붙어 자는 게 당연했다가 지금은 각방이 현명한 선택으로 재평가받는 걸 보면, 결국 정답은 없고 그때그때 맞는 방식만 있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우리도 언젠가 슬립 디보스나 이불 분리 쪽으로 옮겨갈지도 모르겠다. 다만 아직은 신랑 등에 붙어야 잠이 오는 걸 보면, 나는 당분간 스푸닝파로 남을 것 같다.

스물한 살엔 법이 어른이라 했는데, 쉰 살엔 아무도 안 물어본다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영국에서 쉰 살이 갖는 의미를 스물한 살과 비교해 이야기해볼게요.


몇 년 전 나는 영국의 21번째 생일이 왜 특별한지를 글로 쓴 적이 있다. 21살이 되면 술을 완전히 합법적으로 사고 마실 수 있어서, 그 나이대 영국 청년들이 클럽이나 바를 빌려 성인식처럼 파티를 연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만나는 사람마다 나한테 장난스럽게 "이게 네 21번째 생일이야?"라고 묻던 것도 생생하다. 나이 얘기를 회피하고 싶은 여자의 마음을 다들 알아서, 진짜 나이 대신 21살이라고 눙치고 넘어가는 게 일종의 놀이였다.

그런데 이번엔 완전히 다른 생일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남편이 올해 쉰이 된다. 그리고 나도 2년 후면 쉰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영국에서 쉰 살은 스물한 살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의미가 있을까.

스물한 살엔 법이 어른이라 했는데, 쉰 살엔 그런 게 없다

먼저 확실히 해둘 게 있다. 스물한 살은 법이 정해준 관문이었다. 그 날을 기점으로 술집과 클럽에서 신분증 검사 없이 술을 살 수 있게 되는, 명확한 제도적 전환점이었다. 그런데 쉰 살은 다르다. 영국 법 어디에도 쉰 살이 되면 뭔가 새로 허락되거나 바뀌는 조항은 없다. 운전면허도, 투표권도, 음주도 이미 오래전에 다 해결된 나이다. 법적으로는 그냥 평범한 하루다. 은퇴나 연금 얘기도 쉰이 아니라 훨씬 나중, 60대 이후에나 등장하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영국인들은 쉰을 유난히 크게 챙긴다

법이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신기하게도 영국인들 사이에서 쉰 번째 생일은 다른 어떤 열 단위 생일보다 무겁게 다뤄진다. 흔히 "half century(반세기)"라고 부르고, 좀 더 캐주얼하게는 "the Big 5-0"이라고 한다. 마흔 살 생일도 크게 챙기긴 하지만, 쉰이 되면 그 규모와 진지함이 한 단계 더 올라간다는 얘기를 주변에서 여러 번 들었다. 몇 달 전부터 파티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사람도 많고, 검은 풍선이나 "over the hill(이제 내리막길)"이라고 놀리는 문구가 적힌 카드를 주고받는 유머러스한 전통도 있다. 마흔이 "아직 젊다"는 자기 위안이 가능한 나이라면, 쉰은 인생의 절반 지점을 공식적으로 통과했다는 걸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나이인 것 같다.

법적 의미가 있던 스물한 살은 오히려 담백하게 지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 법적 의미가 없는 쉰 살 앞에서는 다들 한 번쯤 멈춰 서서 인생을 돌아본다는 게 재미있는 대비다. 제도가 나이를 규정해주지 않으니, 그 빈자리를 감정과 상징이 대신 채우는 셈이다. 21살은 "이제부터 뭘 할 수 있다"는 미래형 생일이었다면, 쉰 살은 "지금까지 뭘 해왔다"는 과거형 생일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나도 2년 후면 쉰이다

이 글을 쓰면서 계속 내 얘기가 겹쳐졌다. 몇 년 전 그 스물한 살 글을 쓸 때 나는 서른 즈음이었고, 나이 얘기 자체가 우스갯소리였다. 그런데 지금은 좀 다르다. 남편의 쉰 번째 생일을 준비하면서, 나도 모르게 2년 후의 내 모습을 자꾸 그려보게 된다. 그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 시작한 이 블로그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스친다.

영국에서 쉰은 법이 아니라 사람들의 태도가 만든 무게 있는 생일이라는 걸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정해진 의미가 없다는 건, 그 의미를 내가 채워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올해 남편의 쉰 번째 생일엔, 스물한 살 때처럼 법이 허락한 자유를 축하하는 대신, 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반세기 가까운 시간을 그냥 담담히 축하해주고 싶다.

영국에서 처음 만났을 때 진짜 쓰는 표현들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영국에서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진짜 쓰는 표현들을 이야기해볼게요.


전에 나는 영국에서 자주 듣는 질문과 표현들을 정리한 적이 있는데, 그건 대부분 통성명 이후, 그러니까 이미 대화가 좀 진행된 다음의 이야기였다. 오늘은 그 앞 단계, 정말 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그 몇 초만 따로 떼어서 들여다보려 한다. 이 순간에만 쓰는 표현들이 따로 있더라.

악수는 하는데, 짧고 가볍다

첫 만남에서 가장 먼저 부딪히는 건 말이 아니라 동작이었다. 영국인들은 처음 만나면 악수를 하긴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고 가볍다. 손을 한 번 위아래로 흔들고 바로 놓는 정도. 처음엔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 조금 당황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정석이었다. 포옹은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면 첫 만남에서 절대 안 한다. 오히려 나 역시도 친하지 않는 사람과 친한 척 하면서 포옹하거나 신체를 터치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영국인들의 거리감이 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Nice to meet you" 다음에 오는 진짜 표현들

"Nice to meet you"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 다들 안다. 그런데 실제로 영국인들과 부대 끼며 들어보면 훨씬 다양한 표현이 오간다. "Lovely to meet you"는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 좀 더 따뜻한 느낌으로 자주 쓴다. 격식 있는 자리에서는 "It's a pleasure" 혹은 "Pleasure to meet you"도 흔하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 중에는 아직도 "How do you do?"라고 인사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건 진짜 질문이 아니다. 대답도 "I'm fine, thanks"가 아니라 똑같이 "How do you do?"라고 되돌려주는 게 정석이라, 처음 들었을 땐 서로 같은 말만 반복하는 웃긴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 교과서에 나오는 표현이라 다들 알 것 이다~)

날씨 얘기, 그리고 지역마다 다른 애칭

영국인들과 첫 만남에 정적이 흐르는 그 순간을 채우는 만능 카드는 역시 날씨다. "Bit chilly today, isn't it?", "Lovely weather we're having" 같은 말들이 낯선 사람 사이의 어색함을 깨는 단골 멘트다. 신기한 건, 이 말에 정말 날씨 얘기로 진지하게 답하기보다는 그냥 가벼운 리듬을 맞춰주면 된다는 거였다.

재미있게도 무더운 날엔 다들 "hot"이라는 말은 잘 안 쓴다. 대신 "It's boiling"이라는 표현을 가장 흔하게 듣는다. 조금 더 캐주얼하게는 "It's roasting"이라고 투덜대고, 뉴스에서 폭염을 다룰 때는 "It's scorching"처럼 훨씬 강렬한 단어가 등장한다. 여기에 습하고 끈적한 날씨엔 따로 "muggy" 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 말이 나오는 날이면 다들 유독 더 힘들어했다. 날씨 하나를 표현하는 데도 이렇게 세분화된 단어가 있다는 게, 날씨 얘기를 유난히 사랑하는 '영국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역마다 낯선 사람을 부르는 애칭이 다르다는 것도 살면서 알게 됐다. 어딜 가나 흔한 건 mate, love다. 처음 보는 카페 직원이 "Here you go, love"라고 하거나, 낯선 남자가 "Cheers, mate"라고 하는 걸 듣고 처음엔 되게 친한 척한다고 느꼈는데, 그냥 그 지역의 인사 방식이었다. 브리스톨에서는 "me lover""me babber" 같은 특유의 표현도 들을 수 있는데, 처음 듣는 사람은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하기 십상이다. 다른 지역에 가면 duck, pal, chuck처럼 또 다른 애칭이 쓰이니, 이런 표현들도 알아두면 좋겠다.

헤어질 때도 표현이 따로 있다

첫 만남이 끝날 때도 정해진 표현들이 있다. "Take care", "Have a good one", "Catch you later" 정도가 흔하고, 다시 만날 걸 기대하는 자리라면 "See you around"를 많이 썼다. 격식 있는 자리라면 "It was lovely meeting you"로 마무리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이 표현들을 하나씩 배워가면서 느낀 건, 결국 중요한 건 단어 자체가 아니라 그 짧은 순간의 리듬이라는 거였다. 상대가 던진 가벼운 말에 너무 진지하게 답하지 않고, 비슷한 무게로 가볍게 받아주는 감각. 그걸 몸에 익히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지만, 지금은 낯선 영국인을 만나도 그 첫 몇 초가 더는 어색하지 않다. 이런 것이야말로 영국에서 살면서 몸으로 터득하는 자연스러운 영어가 아닌가 싶다

"임신 유세"라는 말, 영국에는 없는 이유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한국의 "임신 유세"라는 말이 영국에는 왜 없는지 이야기해볼게요.


임신하기 전, 신랑은 나한테 종종 이런 말을 했다. "너는 임신 유세가 무척 심할 것 같아.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나를 다 시키겠지." 반은 농담, 반은 진심이었던 그 말은 결국 씨가 됐다. 입덧이 심했던 임신 초기부터, 나는 정말로 집안일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나중엔 "우리 아기가 까롱이가 먹고 싶대"라며 태아 핑계까지 대다가, 신랑한테 "애 핑계 대지 말고 네가 먹고 싶다고 해"라는 핀잔을 들은 적도 있다.

'임신 유세'는 그때도 나를 웃게 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참 유난이었다. 시어머니는 지금도 가끔 "나 임신했을 때 그렇게 갈비가 먹고 싶었는데 안 사주더라"며 몇십 년 전 서운함을 꺼내신다. 그 정도로 한국에서 임신 유세는 며느리와 아내들 사이에서 거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었다. 임신했을 때 아니면 언제 이렇게 마음껏 부려보겠냐는 주변의 부추김도 한 몫 했다. 막달 즈음엔 내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뱃속 태동이 유독 강하게 느껴졌는데, 그 이후로 신랑은 내가 뭘 먹고 싶다고만 하면 두말 없이 사다 주기 시작했다. 임신 유세를 받아주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들이 그 서운함을 오래도록 곱씹는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워낙 많이 들었던 터라, 나는 오히려 운이 좋았던 축에 속했다.

영국엔 애초에 그런 게 없었다

그런데 영국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 얘기를 나누면서 완전히 다른 반응을 마주했다. 출산 경험이 있는 영국 할머니, 아주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임신 유세 비슷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비슷한 또래의 영국인 친구가 임신했을 때 넌지시 물어봤더니, 그런 게 있냐며 오히려 신기해했다. 남편에게 특별히 뭔가를 요구하거나 조른다는 개념 자체가 낯선 눈치였다.

그때는 그냥 문화 차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아마 서구권은 원래 개인주의가 강해서 임신도 '내가 알아서 견디는 일'로 여기는 게 아닐까 싶었다. 실제로 임신·출산 카페를 보면, 서양권 남편을 둔 여자들이 임신 유세가 전혀 안 통해서 서운했다는 글도 종종 보였으니까.

그런데 요즘 한국은 달라지고 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이 글을 다시 들여다보다가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 한국의 최근 통계를 보니, 남성 육아휴직급여 수급자가 전년 대비 60% 넘게 늘었고, 전체 육아휴직 수급자 중 남성 비율이 36.5%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고 한다. 게다가 올해 하반기부터는 배우자 출산휴가를 출산 이후가 아니라 출산 예정일 50일 전부터 쓸 수 있게 제도가 바뀐다. 산전 검진에 같이 가고, 출산을 함께 준비하라는 취지다. 배우자가 유산이나 사산을 겪었을 때 쓸 수 있는 휴가까지 새로 생겼다고 하니,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변화다.

이 소식을 보면서 묘한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아내가 유세를 부려야만 남편이 관심을 갖던 일이,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제도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거다. 남편의 임신 기간 참여가 아내의 애교나 협상력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보장받는 권리가 되어가는 셈이다. 어쩌면 영국 친구들이 임신 유세를 이해 못 했던 이유도, 애초에 그쪽에서는 파트너의 참여가 조르지 않아도 되는 당연한 몫으로 여겨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결국 한국이 지금 향하고 있는 방향이, 그때 내가 신기하게 봤던 영국의 모습과 은근히 닮아 있다는 게 재미있다.

그때는 임신 유세를 "부정적인 말보다는 임신 애교로 부르자"며 애써 순화했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애초에 유세든 애교든 이름 붙일 필요조차 없는 게 맞는 방향 같다. 남편이 아내의 임신과 출산 과정에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게 조르고 얻어내야 하는 특혜가 아니라 기본값이 되는 것. 제도가 먼저 그 기본값을 만들어주면, 말로 설득하고 애교로 조르는 수고는 자연히 줄어들 거다. 한국이 그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게, 나는 꽤 반갑다. 다음에 누군가 임신하면, "유세 좀 그만 부려"라는 핀잔보다 "당연히 같이해야지"라는 말을 먼저 듣게 되면 좋겠다.

유난히 해를 좋아하던 영국인들도, 이번엔 두 손 들었다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해를 그렇게 좋아하던 영국인들이 이번 폭염엔 두 손 든 이야기를 해볼게요.


요즘 한국 뉴스만 틀면 폭염 얘기다. 에어컨 없이는 한 발짝도 못 나가겠는 날씨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영국에서 살던 시절이 자꾸 떠올랐다. 정확히는, 영국인들이 해만 뜨면 잔디밭에 벌러덩 눕던 그 장면이. 그리고 최근에 영국도 이번 여름 엄청난 더위에 시달렸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햇빛이 무서워졌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재미있는 반전이 일어났다. 나는 영국에서 7년 사는 동안 해를 보면 반가웠던 사람이다. 하늘이 파랗고 해가 쨍하면 무조건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흐리고 우중충한 날이 많은 나라에서 살다 보니, 해가 나는 날 자체가 일종의 이벤트였다. 그런데 요즘 한국 여름 뙤약볕 아래 서 있으면 숨이 턱 막힌다. 잠깐만 걸어도 땀이 비 오듯 하고, 자외선이 피부에 내리꽂히는 게 느껴질 정도다. 영국에서는 그렇게 반갑던 해가, 한국에서는 어느새 피하고 싶은 존재가 됐다. 같은 사람이 같은 해를 이렇게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아마 해의 '희소성'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 귀하면 반갑고, 흔하다 못해 매일 쏟아지면 버거워지는 거다.

영국인들의 햇빛 사랑, 그땐 정말 유별났다

돌이켜보면 영국에서의 햇빛 사랑은 정말 각별했다. 3월만 돼도 17~20도에 반팔을 꺼내 입었고, 대학 캠퍼스 잔디밭엔 책 읽는 사람, 운동하는 사람, 그냥 누워만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본격적으로 더워지는 여름이면 공원이며 정원이며 할 것 없이 비키니 차림으로 돗자리를 깔고 서로 오일을 발라주며 선탠을 하는 여학생들을 보고 나는 매번 놀랐다. 캔터베리의 어느 정원에서는 친구와 벤치에 앉아 있다가, 옆에 돗자리를 깐 어린 커플이 너무 진하게 애정 행각을 벌이는 바람에 자리를 슬쩍 옮겼던 기억도 있다.

반대로 나는 그 강한 자외선이 무서워서 늘 가디건과 선크림, 선글라스로 중무장을 했다. 한번은 어깨가 파인 옷을 입고 2주쯤 다녔더니 없던 점이 팔과 어깨에 잔뜩 생긴 걸 보고 기겁한 적도 있다. 영국인 아주머니는 그런 나를 보며 "동양 여자들은 왜 그렇게 해를 싫어하냐"는 표정을 짓곤 했다. 그 정도로 그들에게 햇빛은 쬐지 못해 안달인 귀한 존재였다.

그 영국인들도, 이번엔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런데 올해 영국 소식을 들으니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5월에 이미 켄트 가든스에서 35도가 넘는 기록적인 더위가 찍혔고, 6월엔 노퍽 지역이 37.7도까지 올랐다. 5~6월 폭염으로 인한 사망 추정치가 2천 명을 넘는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7월에는 잉글랜드 남부가 관측 이래 가장 건조한 7월을 기록했고, 산불까지 번졌다. 켄트 일부 지역은 물 부족으로 호스파이프 사용 제한령까지 내려졌다고 한다.

에어컨이 흔치 않은 나라에서 이 정도 더위라니,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잔디밭에 누워 여유롭게 해를 즐기던 그 사람들이, 이번엔 폭염 경보에 벌벌 떨며 응급 전화가 폭주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왔다. 그렇게 해를 사랑하던 사람들도 결국 정도가 있었던 거다. 해가 귀해서 좋아했던 거지, 해에 시달리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이 소식을 들으며 나는 묘한 위안을 받았다. 나만 해를 유난스럽게 피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나 해를 반기던 사람들조차 결국 백기를 든 걸 보면서, 더위 앞에서는 다들 평등하구나 싶었다. 좋아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는 진리를, 영국인들이 이번 여름 몸소 증명해 준 셈이다.

지금 한국에서 폭염에 시달릴 때마다, 나는 영국 잔디밭에 눕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도 지금쯤 그늘을 찾아다니고 있겠지. 영국에 있었으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 얘들아, 이게 바로 한국 여름이거든~~~ 이제 알겠지? ㅎㅎ

영국 대학원, 이제는 순위표만 보면 안 된다

이 글의 영국 취업·비자 관련 수치는 영국 정부(Home Office) 발표 기준으로 작성 시점(2026년 7월) 정보를 반영했어요. 이민 정책은 자주 바뀌니, 실제 지원 시 GOV.UK에서 최신 기준을 다시 확인하세요.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영국 대학원 선택할 때 순위표만 보면 안 되는 이유를 이야기해볼게요.


몇 년 전 나는 영국 대학원을 고르는 법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 강조했던 건 딱 세 가지였다. 순위표를 보고 학교를 추리고, 대학원생 전용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지 확인하고, 영어 점수가 모자라면 프리세셔널 코스를 알아보라는 것. 지금 다시 읽어보니 틀린 말은 아닌데, 뭔가 중요한 게 빠져 있었다. 그때는 '어떻게 공부를 잘 마치느냐'만 생각했지, '공부를 마친 다음 이 나라에 남을 수 있느냐', '영국에서 학위를 받아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 영국은 그때와 완전히 다른 나라다. 그래서 오늘은 그 글을 업데이트해 보려 한다.

그때는 순위표, 지금은 생존표

몇 년 사이 영국의 취업 비자 문턱은 눈에 띄게 높아졌다. 스킬드 워커 비자(Skilled Worker Visa)의 일반 연봉 기준이 훌쩍 올랐고, 학위 수준도 사실상 학사 이상(RQF 6단계 이상)으로 맞춰졌다. 졸업 후 2년 간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그래주에이트 비자(PSW)가 있긴 하지만, 그 2년 안에 스폰서를 구해 스킬드 워커로 전환하지 못하면 결국 짐을 싸야 한다. 즉, 예전에는 "졸업장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였다면, 지금은 "졸업 후 2년 안에 나를 써줄 회사를 찾을 수 있는 전공인가"까지 입학 전에 따져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 변화를 몰랐던 게 아니라, 그때는 이걸 대학원 선택의 기준으로 놓을 생각 자체를 못 했던 거다. 지금이라면 순위표를 펴기 전에 이 질문부터 던지라고 말하고 싶다.

학과 선택, 이제는 '부족 직군'과 연결해서 봐야 한다

영국 정부는 자국 인력으로 못 채우는 직군을 이민 임금 목록(Immigration Salary List)이라는 걸로 관리한다. 이 목록에 오른 직군은 스킬드 워커 비자의 연봉 기준이 일반보다 낮게 적용된다. 즉, 취업만 된다면 비자 문턱 자체가 낮아지는 분야라는 뜻이다. 지금 이 목록의 큰 축은 간호·의료 관련 헬스케어, 엔지니어링, 그리고 특정 IT·기술 직군이다. 학사 이하 수준의 직군을 위한 임시 목록도 별도로 운영되는데, 건설 기술직이나 IT 기술직 일부가 여기 해당한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학원 전공을 고를 때, "내가 좋아하는 분야"와 "영국 사회가 지금 사람을 못 구해서 아우성인 분야"가 겹치는 지점을 찾으면 졸업 후의 그림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거다. 인문·사회 계열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같은 관심사 안에서도 조금 더 실무·기술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만으로 취업 확률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안다.

순위표 대신 이제 봐야 할 두 가지

첫째, 졸업생 취업 통계다. 영국 대학들은 졸업 후 15개월 시점의 취업·진학 현황을 조사한 자료를 공개한다. 학교 홈페이지에서 전공별 취업률과 평균 연봉대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게 순위표보다 훨씬 정직한 지표다. 랭킹은 높은데 정작 이 전공 졸업생들의 취업률이 낮다면, 그 랭킹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다.

둘째, 커리어 서비스의 실질적인 힘이다. 예전 글에서도 대학원생 전용 프로그램 얘기를 했었는데, 지금은 여기에 '기업 연계'까지 봐야 한다. 그 학과가 어떤 기업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지, 스폰서 라이선스를 가진 기업 채용 설명회가 실제로 열리는지, 인턴십 연계가 있는지. 학과 홈페이지의 Careers 섹션을 꼼꼼히 보고, 그래도 불확실하면 재학생이나 최근 졸업생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 물어보는 게 제일 정확하다.

그래서 지금 다시 고른다면

프리세셔널 코스나 대학원생 교육 프로그램 같은 예전 조언들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그건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지금 다시 대학원을 고른다면, 나는 순위표를 맨 앞이 아니라 두 번째 기준으로 미룰 것 같다.

제일 먼저 볼 건 이 전공이 졸업 후 나를 이 나라에 붙잡아 줄 수 있는지다. 랭킹 좋은 학교의 졸업장보다, 비자 신분을 이어갈 수 있는 졸업장이 지금은 훨씬 무겁다.

영국 7년 살아도, 난 바쁜 한국 사람이다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영국에서 7년을 살아도 여전히 바쁜 한국 사람인 제 이야기를 해볼게요.


한국에 돌아온 첫 주, 버스가 안 오면 계속 휴대폰 버스 오는 경로를 세로고침을 한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는 계속 빨리빨리 라는 단어가 불쑥불쑥 나오고,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펴놓고 계속 뭔가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딱히 급한 일이 없는데도, 그냥 가만히 있질 못했다. 나도 모르게 메일함을 새로고침하고, 할 일 목록을 다시 정리하고, 안 봐도 되는 뉴스를 훑었다. 영국에서 7년을 살면서 나는 분명 '아무것도 안 하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 배움이 통째로 증발한 느낌이었다.

영국에서 배운 것 — '텅 빈 주말'이 자랑이 되는 나라

영국 친구들은 주말 계획을 물으면 종종 이렇게 대답했다. "I've got nothing on(나 아무 일정도 없어)." 그 말투에 죄책감이라곤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투였다. 처음엔 그게 어색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계획 없음'은 게으름의 다른 말이었으니까. 그런데 7년을 살다 보니 나도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게 됐다. 소파에 누워서 반나절을 흘려보내도, 그게 실패한 하루가 아니라 그냥 '잘 쉰 하루'였다. 영국의 짧고 우중충한 겨울, 그리고 유난히 긴 여름 해 아래서, 나는 비생산적인 시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감각을 몸에 새겼다.

한국에 돌아오니, 그 감각이 통째로 낯설어졌다

그런데 돌아오니 상황이 달랐다. 누군가 요즘 뭐 하고 지내냐고 물으면, 나는 반사적으로 뭔가 대답할 거리를 찾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낸다는 말이 입 밖으로 잘 안 나왔다. 카페에 가도, 공원에 가도, 다들 뭔가를 하고 있었다. 노트북을 펴거나,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거나. 가만히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잘 안 보였다. 

아이러니하게 내가 영국에서 가장 부럽고 잘 하지 못했던 것이 바로 공원 의자에 앉아 멍 ~ 때리는 일이었다. 영국인들은 특히 점심 시간에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놀랐고, 나중에는 나도 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귀국 후 점심 시간에 공원 의자에 홀로 앉아 있으면 그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나만 뒤처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고, 그 기분을 떨쳐내려고 나도 자꾸 뭔가를 벌였다. 지나고 보니 그게 딱히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해야 할 것 같아서' 시작한 일이 많았다.

친구들을 만나도 비슷했다. 근황을 나누는 자리에서 다들 은근히 서로의 '요즘 하는 일'을 헤아렸다.  자격증을 따고 있다거나, 부업을 시작했다거나, 운동을 몇 개월째 하고 있다거나. 나는 그 대화 속에서 나도 뭐라도 말해야 하나 싶어 초조해졌다. 영국에서는 "그냥 잘 쉬고 있어"라는 대답이 완결된 문장이었는데, 한국에서는 그 뒤에 반드시 다음 문장이 따라붙어야 할 것 같았다.

가장 크게 느낀 건 속도였다. 영국에서는 은행 업무 하나 처리하는 데도 며칠이 걸리는 게 당연했다. 배송은 일주일이 기본이었고, 관공서 답장은 한 달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 느림이 처음에는 답답하고 화가 났지만, 어느 새 적응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한국은 모든 게 즉각적이었다. 주문하면 다음 날 도착하고, 문의하면 몇 시간 안에 답이 왔다. 처음엔 이 빠른 속도가 신세계처럼 느껴져서 좋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속도가 사람한테도 똑같이 요구된다는 걸 알았다. 느리게 반응하면 뒤처진 사람 취급을 받았다. 메시지 하나에 몇 시간이 걸리면 무슨 일 있냐는 연락이 왔고, 나는 그때마다 영국이었으면 이게 당연한 속도였을 텐데, 하고 혼자 억울해했다.

지금은 이렇게 타협하며 산다

벌써 13년이 지난 지금, 나는 두 속도 사이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다. 완전히 한국의 속도로 돌아가지도, 그렇다고 영국식 여유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대신 의식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는다. 예전 같으면 자연스러웠을 그 시간이, 이제는 일부러 지켜야 하는 습관이 됐다는 게 좀 서글프기도 하다. 달력에 일부러 아무 약속도 안 잡는 날을 만들어두기도 하지만, 참 그게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우습게도 '쉬는 것'을 스케줄링해야 하는 처지가 된 거다.

가끔은 그 시절 내가 부러워하던 영국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무 일정 없다고 말하면서도 전혀 불안해하지 않던 표정들. 나는 이제 그 표정을 완전히 재현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런 얼굴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는 것 만으로도 다르게 산다고 생각한다.

영국에서 산 7년은 나에게 느리게 사는 법을 가르쳐줬고, 한국에 돌아온 몇 년은 그걸 다시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완벽하게 그때의 리듬으로 돌아가긴 어렵겠지만, 가끔 카페에 앉아 아무것도 안 하고 창밖만 보는 순간이 오면, 나는 여전히 그 시절의 나를 아주 잠깐 다시 만난다.

영국 집에 얹혀사는 불청객, mouldy와의 전쟁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영국 집에 얹혀살던 불청객 mouldy와의 전쟁 이야기를 해볼게요.


내가 영국에서 가장 많이 산 물건 순위를 매기면, 1위는 아마 락스일 거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이 집에 나보다 먼저 살고 있던 불청객 얘기부터 해야 한다. 이름하여 마울디(mouldy).

첫 대면 — 주인집 아줌마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것

이사 온 지 한 달째, 집세를 받으러 온 주인 아줌마가 갑자기 나를 화장실로 이끌었다. 욕조 천장을 가리키며 까맣게 점 박힌 자국을 보여주더니, 웃으며 한마디 했다. "Mouldy? Funny word."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따라 웃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곰팡이였다. 뜨거운 물의 수증기가 벽을 타고 올라가 만든, 화장실 천장의 검은 얼룩. 그날 나는 내 평생 첫 마울디를 소개받았다.

지금 사는 집은 200년이 넘은 목조 건물이라 천장까지 낮아서, 마울디한테는 그야말로 최적의 서식지다. 다른 집보다 훨씬 자주, 훨씬 뻔뻔하게 찾아온다.

1라운드 — 그의 서식지 조사

마울디는 아무 데나 자리 잡지 않는다. 좋아하는 자리가 따로 있다. 욕조 천장, 창틀, 심지어 커튼까지. 특히 겨울에 왕성해지는데, 온수 샤워를 하면 할수록 습기가 쌓이고, 그게 곧 그의 번식 신호탄이 된다. 우리 집 룰은 하나다. 욕조 밖으로는 절대 물을 내보내면 안 된다. 목조 건물이라 물이 밖으로 새면 큰일이라, 세면대와 변기, 욕조만 물로 살살 청소해야 한다.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샤워기로 벽과 바닥을 시원하게 뿌려대는 청소는 여기선 상상도 못 한다. 청소를 하고도 개운하지가 않은 이유다.

2라운드 — 무기는 락스, 전술은 힘 조절

마울디를 상대하는 무기는 명확하다. 브리치, 우리로 치면 락스. 휴지나 키친타월에 브리치를 조금 묻혀서 힘줘서 닦으면 검은 점들이 순순히 사라진다. 문제는 이게 일회성 승리라는 거다. 방심하면 며칠 안에 그가 다시 나타난다. 마울디와의 전쟁에 휴전이란 없고, 정기적인 순찰과 즉각 진압만 있을 뿐이다.

재미있는 건 이 단어의 활용 범위다. 화장실 벽에 피는 것도, 오래된 빵이나 과일 겉면에 하얗게 앉은 것도, 냉장고 구석에서 발견되는 정체불명의 초록빛 얼룩도 전부 mouldy다. 처음엔 화장실 전용 단어인 줄 알았는데, 살다 보니 이 나라에서 '축축하고 방치된 곳에 피는 모든 것'을 통칭하는 만능 단어였다. 그만큼 영국인들의 일상에 이 녀석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3라운드 — 신랑의 방심, 마울디의 대반격

원래 화장실 청소는 신랑 담당이었다. 그런데 요즘 공부한다고 신경을 놓아버린 사이, 마울디가 세를 확장했다. 벽만 점령하던 그가 이제는 창틀도, 커튼도 접수해 버린 거다. 신랑에게 이 상황을 보여주니 그도 놀란 눈치였다. 이번 주말엔 둘이 총출동해서 완전 진압에 나서기로 했다. 곰팡이 앞에서는 부부 싸움도 잠시 미뤄두고 한 팀이 되는 거다.

마울디는 계속 돌아온다 — 그래서 나는 이렇게 지낸다

몇 년째 살아보니 알겠다. 이 전쟁에 완전한 승리는 없다는 걸. 영국의 습한 날씨와 오래된 건물 구조, 그리고 매일의 온수 샤워가 있는 한, 마울디는 언젠가 반드시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그를 없애야 할 적이라기보다, 정기적으로 관리해야 할 이 집의 룸메이트쯤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한국 마트에서는 곰팡이 제거제가 특수 코너에 조용히 놓여 있다면, 영국 대형 마트에서는 한 매대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다. 그만큼 이 나라 사람들 모두가 마울디와 동거 중이라는 뜻일 거다. 청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조차 이제는 정기 순찰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창틀은 일주일에 한 번, 화장실은 샤워할 때마다 물기를 닦아내고, 겨울엔 조금 춥더라도 창문을 자주 열어 환기를 시킨다. 완벽하게 없애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나니, 오히려 관리가 더 수월해졌다.

돌이켜보면 그와의 첫 만남에서 나는 그저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는데, 몇 년을 살고 나니 이제는 이 이야기를 웃으며 할 수 있게 됐다. 영국에서 오래 산 사람이라면 다들 마울디와의 무용담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거다. 이번 주말 신랑과 함께할 대청소도, 승리 선언이 아니라 그저 다음 라운드를 준비하는 일일 뿐이다.

영국 대학생도 방학에는 알바한다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영국 대학생들이 방학마다 알바하는 이야기를 해볼게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나는 영국 여대생들과 한 집에서 산 적이 있다. 시험이 끝나던 날 그녀들이 보인 반응이 아직도 기억난다. 시험이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짐을 미친 듯이 싸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엔 집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러고는 개강 일주일 전에야 다시 나타났다.

그때는 그냥 신기했는데, 살아보니 이게 영국 대학생 방학의 표준 패턴이더라.

한국보다 짧은 방학, 그런데 총량은 비슷하다

영국 대학의 겨울 방학은 크리스마스를 끼고 한 달 정도다. 한국의 길고 긴 겨울 방학에 비하면 짧다. 대신 학기 중간에 한 주씩 쉬는 리딩 위크가 있고, 3월 중순부터 4월 초까지 3~4주짜리 부활절 방학이 따로 있다. 다 더하면 한국 대학생의 방학 일수와 별 차이가 없다.

5~6월 시험이 끝나면 기숙사생들은 곧장 짐을 싼다. 기숙사에서 퇴실해야 하니까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짐이 많아서 버스나 기차로는 감당이 안 되니, 보통 부모님이 차를 몰고 데리러 온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간 학생들은 몇 주 정도는 그동안 못 본 가족, 동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다. 에세이와 시험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엄마 밥으로 회복하는 시기랄까.

방학 내내 놀지는 않더라

그런데 그게 방학 전체는 아니었다.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걸로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하나, 알바다. 우리 교회 청년들만 봐도 그랬다. 방학이면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서 자원봉사를 하거나 단기 알바를 뛴다. 특히 여름은 세일 시즌에 직원들 휴가까지 겹쳐서 상점마다 구인이 쏟아지는 때라, 자리 나기가 무섭게 채워진다. 이미 학기 중에 일을 하던 학생들은 아예 부모님 집에 몇 주만 다녀오고 바로 돌아와 방학 내내 일한다. 영국은 시급이 높은 편이라, 석 달만 풀타임(주 30~35시간)으로 일해도 한 학기 생활비가 나오고 남는다. 대신 방학 다운 방학은 없는 셈이지만.

둘, 여행이다. 영국에서 유럽은 옆 동네 드나들듯 가깝다. 그래서 현지인 대부분이 유럽 여행 경험이 있고, 여름휴가는 거의 필수 코스다. 내가 아는 대학 2학년 학생은 여자친구와 한 달짜리 유럽 여행을 계획하면서 그 경비를 벌려고 몇 달째 알바 중이었다. 국제 커플이면 방학이 곧 상봉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일본인 여자친구를 둔 영국 학생 하나는 겨울 방학 내내 일본에 가 있었다. 부모님의 고향, 그러니까 조부모님 댁에 온 가족이 모이는 경우도 흔했다. 웨일스나 스코틀랜드가 고향인 교회 지인은 방학마다 온 가족이 그쪽으로 이동했다.

셋, 인턴십이다. 이게 가장 눈에 띄게 늘어난 흐름이었다. 영국 회사들은 채용할 때 관련 업무 경험을 상당히 따진다. 그래서 졸업 후 취업을 염두에 둔 2학년들부터 방학마다 인턴십에 매달린다. 여름이면 런던으로 얼마나 많은 학생이 몰리는지, 경쟁이 상당하다. 성적이 안 되면 지원 자체가 막히는 경우도 많아서, 1학년 때부터 학점 관리를 신경 쓴다. 영국에서 자리를 못 구한 유학생들은 아예 본국으로 돌아가 인턴십을 하기도 했다.

10년이 지나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

이 관찰을 처음 했던 게 벌써 20년도 더 전이다. 그사이 브렉시트를 지나고, 물가가 치솟고, 대학생 알바 자리는 더 구하기 힘들어졌다는 이야기를 요즘도 듣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구조 자체는 그대로다. 알바로 생활비를 메우고, 여행으로 숨을 돌리고, 인턴십으로 스펙을 쌓는 삼각형. 오히려 요즘은 원격 인턴십이나 온라인 사이드 프로젝트까지 더해지면서, 이 삼각형이 더 촘촘해졌으면 했지 헐거워지진 않은 것 같다.

결국 영국이든 한국이든, 대학생의 방학은 순수한 휴식이 아니라 다음 학기, 혹은 졸업 이후를 준비하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이 씁쓸하면서도, 어느 나라 청춘이든 다 비슷하게 애쓰며 산다는 게 묘하게 위안이 되기도 했다.

영국 대학 기숙사엔 '남녀 혼성' 항목이 있다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브리스톨에서 석사 경험을 가지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영국 대학 기숙사에 있는 '남녀 혼성' 항목 이야기를 해볼게요.


영국 유학 전까지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해 본 경험이 전무했던 사람이라, 석사 기숙사 신청서를 받아 들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선택 항목이 딱 두 개였다.

금연이냐 흡연이냐, 그리고 — 남녀 혼성(Mixed)이냐 여자만(Only Female)이냐.

나는 그때까지 부모님 곁을 떠나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주변에 자취하는 지방 친구도 거의 없어서, 낯선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사는 것 자체를 몰랐다. 그런데 그 낯선 사람이 심지어 남자일 수도 있다니. 나이에 비해 순진했던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금연 & 여자만'을 골랐다.

금남의 집에서 보낸 한 달

내가 들어간 기숙사 호수에 도착해서 알았다. 여자만 사는 곳이라 그런지, 살고 있는 사람이 전부 한국·중국·일본 여학생들이었다. 여중고를 나온 나한테는 오히려 익숙한 그림이었다. 잠옷 바람으로 복도를 돌아다니고, 밤 9시만 넘으면 다들 조용히 잠자리에 드는, 지나치게 모범적인 생활이 한 달간 이어졌다. 나중에 알았는데, 외국인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 호수는 '금남의 집'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남녀혼성 기숙사가 얼마나 다른 세계인지 전혀 몰랐으니까.

학기가 시작되며 신세계로

학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다른 기숙사로 옮겨야 했고, 금남의 집에 살던 동양 여학생들은 전부 남녀혼성 기숙사로 흩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완전히 다른 생활을 만났다.

밤 9시면 조용해지던 우리 기숙사와 달리, 이곳은 밤늦게까지 파티가 끊이지 않았다. 유럽 학생들은 금요일이면 1차로 기숙사에서 술을 마시고 2차로 클럽에 갔다. 아시아 학생들이 조용히 요리해 먹거나 소소하게 마실 때, 유럽 학생들은 음악을 크게 틀고 춤을 췄다. 체력도 어찌나 좋은지, 같이 놀다 보면 나만 항상 먼저 지쳐 있었다.

부엌은 늘 지저분했다. 남녀 할 것 없이 치우지 않는 학생이 훨씬 많았다. 여름엔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가 열리고, 부활절이나 할로윈 같은 절기 행사도 함께 챙겼다. 한국에서는 친구들끼리 술집이나 노래방을 가는 게 전부였다면, 여기서는 다들 부모님과 떨어져 사니까 기숙사 자체가 하나의 놀이터였다.

여자들끼리만 있을 때는 몰랐던 것도 보였다. 여자만 있는 곳에서는 은근히 '파'가 나뉘고,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 서로를 흉보는 일이 잦았다. 남녀가 섞이니 오히려 그런 신경전이 줄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새침하게 거리를 두던 영국 여학생들보다는 수줍음 많은 영국 남학생들, 혹은 호의적인 다른 유럽 출신들과 지내는 편이 훨씬 편했다.

남녀가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것

영국은 월세가 워낙 비싸서, 낯선 남녀가 한집에 사는 '하우스 쉐어'가 아주 흔하다. 대학생뿐 아니라 미혼 남녀, 심지어 부부도 다른 사람과 방을 나눠 쓴다. 런던처럼 월세가 극단적인 도시일수록 더 그렇다.

기숙사 방에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놀러 와 함께 지내는 일도 흔했다. 공식적으로는 금지였지만 다들 눈감아 줬다. 아예 생활비를 아끼려고 동거하는 커플도 있었다. 옆방 일본 남학생은 스페인 커플의 일 년 치 동거 소음 때문에 매일 밤 귀마개를 끼고 잤고, 프랑스에서 여자친구가 놀러 와 일주일간 저녁까지 같이 먹던 남학생은, 그 여자친구가 돌아가자마자 다른 여자와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좀 낯뜨거운 기억이다.

같은 호수에 살던 유럽 남학생과 아시아 여학생이 사귀다 졸업 후 결혼까지 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사실, 나와 지금의 신랑도 같은 기숙사 — 다른 빌딩이었지만 — 에서 처음 만났다. 남녀혼성 기숙사가 우리 부부에게는 오작교였던 셈이다.

서울 촌뜨기가 그렇게 문화충격을 받으며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던 그 시절이 이제는 아득하다. 그때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신나게 놀았어야 했나 싶은 후회도 잠깐 든다. 그래도 가장 잘한 일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그 기숙사에서 신랑을 만난 것이다. 언젠가 우리 부부의 연애 시절 추억이 남아 있는 브리스톨과 바스에, 다시 한번 같이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