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국제학교 IB 한국어 강사로 일했고 브리스톨에서 석사까지 마친, 지금은 한국에서 지내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영국에서 7년을 살아도 여전히 바쁜 한국 사람인 제 이야기를 해볼게요.
한국에 돌아온 첫 주, 버스가 안 오면 계속 휴대폰 버스 오는 경로를 세로고침을 한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는 계속 빨리빨리 라는 단어가 불쑥불쑥 나오고,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펴놓고 계속 뭔가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딱히 급한 일이 없는데도, 그냥 가만히 있질 못했다. 나도 모르게 메일함을 새로고침하고, 할 일 목록을 다시 정리하고, 안 봐도 되는 뉴스를 훑었다. 영국에서 7년을 살면서 나는 분명 '아무것도 안 하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 배움이 통째로 증발한 느낌이었다.
영국에서 배운 것 — '텅 빈 주말'이 자랑이 되는 나라
영국 친구들은 주말 계획을 물으면 종종 이렇게 대답했다. "I've got nothing on(나 아무 일정도 없어)." 그 말투에 죄책감이라곤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투였다. 처음엔 그게 어색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계획 없음'은 게으름의 다른 말이었으니까. 그런데 7년을 살다 보니 나도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게 됐다. 소파에 누워서 반나절을 흘려보내도, 그게 실패한 하루가 아니라 그냥 '잘 쉰 하루'였다. 영국의 짧고 우중충한 겨울, 그리고 유난히 긴 여름 해 아래서, 나는 비생산적인 시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감각을 몸에 새겼다.
한국에 돌아오니, 그 감각이 통째로 낯설어졌다
그런데 돌아오니 상황이 달랐다. 누군가 요즘 뭐 하고 지내냐고 물으면, 나는 반사적으로 뭔가 대답할 거리를 찾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낸다는 말이 입 밖으로 잘 안 나왔다. 카페에 가도, 공원에 가도, 다들 뭔가를 하고 있었다. 노트북을 펴거나,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거나. 가만히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잘 안 보였다.
아이러니하게 내가 영국에서 가장 부럽고 잘 하지 못했던 것이 바로 공원 의자에 앉아 멍 ~ 때리는 일이었다. 영국인들은 특히 점심 시간에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놀랐고, 나중에는 나도 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귀국 후 점심 시간에 공원 의자에 홀로 앉아 있으면 그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나만 뒤처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고, 그 기분을 떨쳐내려고 나도 자꾸 뭔가를 벌였다. 지나고 보니 그게 딱히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해야 할 것 같아서' 시작한 일이 많았다.
친구들을 만나도 비슷했다. 근황을 나누는 자리에서 다들 은근히 서로의 '요즘 하는 일'을 헤아렸다. 자격증을 따고 있다거나, 부업을 시작했다거나, 운동을 몇 개월째 하고 있다거나. 나는 그 대화 속에서 나도 뭐라도 말해야 하나 싶어 초조해졌다. 영국에서는 "그냥 잘 쉬고 있어"라는 대답이 완결된 문장이었는데, 한국에서는 그 뒤에 반드시 다음 문장이 따라붙어야 할 것 같았다.
가장 크게 느낀 건 속도였다. 영국에서는 은행 업무 하나 처리하는 데도 며칠이 걸리는 게 당연했다. 배송은 일주일이 기본이었고, 관공서 답장은 한 달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 느림이 처음에는 답답하고 화가 났지만, 어느 새 적응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한국은 모든 게 즉각적이었다. 주문하면 다음 날 도착하고, 문의하면 몇 시간 안에 답이 왔다. 처음엔 이 빠른 속도가 신세계처럼 느껴져서 좋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속도가 사람한테도 똑같이 요구된다는 걸 알았다. 느리게 반응하면 뒤처진 사람 취급을 받았다. 메시지 하나에 몇 시간이 걸리면 무슨 일 있냐는 연락이 왔고, 나는 그때마다 영국이었으면 이게 당연한 속도였을 텐데, 하고 혼자 억울해했다.
지금은 이렇게 타협하며 산다
벌써 13년이 지난 지금, 나는 두 속도 사이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다. 완전히 한국의 속도로 돌아가지도, 그렇다고 영국식 여유를 고집하지도 않는다. 대신 의식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는다. 예전 같으면 자연스러웠을 그 시간이, 이제는 일부러 지켜야 하는 습관이 됐다는 게 좀 서글프기도 하다. 달력에 일부러 아무 약속도 안 잡는 날을 만들어두기도 하지만, 참 그게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우습게도 '쉬는 것'을 스케줄링해야 하는 처지가 된 거다.
가끔은 그 시절 내가 부러워하던 영국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무 일정 없다고 말하면서도 전혀 불안해하지 않던 표정들. 나는 이제 그 표정을 완전히 재현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런 얼굴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는 것 만으로도 다르게 산다고 생각한다.
영국에서 산 7년은 나에게 느리게 사는 법을 가르쳐줬고, 한국에 돌아온 몇 년은 그걸 다시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완벽하게 그때의 리듬으로 돌아가긴 어렵겠지만, 가끔 카페에 앉아 아무것도 안 하고 창밖만 보는 순간이 오면, 나는 여전히 그 시절의 나를 아주 잠깐 다시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