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구를 만났는데 예전부터 듣던 말이지만, 이번에는 나에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부부 사이인데 대화가 없다는 거다. 정확히는, 아이 얘기 빼고는 할 말이 없다는 거였다. 오로지 아이 양육에 관련된 것만. 딱 거기까지. 정작 서로가 요즘 뭘 생각하는지, 뭘 힘들어하는지 모른단다. 생활비만 반반 부담하고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이혼은 안 했어. 근데 그냥... 남처럼 살아."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는데,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 주변에 이런 부부, 생각보다 많다.
영국은 이혼을 왜 그렇게 쿨하게 말할까
영국에 살면서 제일 낯설었던 것 중 하나가 이혼을 대하는 태도였다. 결혼해서 성을 안 바꾼 사람도 흔하고, 계좌는 애초에 따로 쓰는 게 기본값에 가깝다. 시댁 어른들 세대만 해도 "우리 옆집은 이번에 갈라섰어" 하는 얘기를 커피 마시면서 아무렇지 않게 한다. 숨기고 자시고 할 일이 아니라는 거다.
실제 수치도 그 얘기를 뒷받침한다. 이혼 후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면서 영국의 1인 가구가 800만 명을 넘어섰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른바 '실버 스플리터(silver splitter)'라 불리는 중장년층 이혼이 그 흐름을 밀어 올렸다는 분석이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건 이혼까지 안 가고 "따로 사는 결혼"을 택하는 사람들이다. 영국 통계청(ONS)이 인용한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로리 콜터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23년까지의 영국 가구 종단조사(UKHLS) 데이터를 분석했더니 60세 이상 영국인의 약 4%가 이른바 'Living Apart Together(LAT)' 관계였다. 결혼 여부와 무관하게 파트너로 지내지만 집은 따로 쓰는 거다. 2021년 영국 센서스에서도 법적 파트너십은 있지만 실제로는 따로 사는 인구가 3%로 집계됐다.
한국은 이혼 대신 '한 집 안의 남'을 택한다
한국은 다르다. 이혼율 자체는 이미 높은 편인데도, 이혼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뭔가 실패의 낙인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 부모님 보기 민망하고, 아이 친구 엄마들 사이에서 뒷담화 주인공이 되는 것도 싫고, 회사에서 알게 되는 것도 부담스럽다. 그러니 선택지가 좁아진다. 갈라서지는 않되, 마음은 이미 갈라선 채로 한 집에 사는 거다.
내 주변 부부들을 보면 패턴이 비슷하다. 대화는 아이 문제로만 오간다. 재정은 공동 경비만 정해 놓고 나머지는 각자 벌어서 각자 쓴다. 서로의 하루가 어땠는지, 요즘 뭐가 힘든지는 물어보지 않는다. 겉으로는 평범한 가족사진 속 부부인데, 속은 완전히 다른 살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혼 서류 한 장 안 썼을 뿐, 사실상 졸혼이나 다름없다.
같은 '따로'인데 방향이 다르다
여기서 정직하게 짚고 싶은 게 있다. 영국의 LAT와 한국의 이 현상은 비슷해 보이지만 방향이 반대다.
영국 쪽 연구에서는 LAT 상태의 노년층이 혼자 사는 사람보다 정신 건강이 낫고, 결혼·동거 상태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즉 영국의 '따로'는 대체로 스스로 고른 선택이고, 관계를 유지하되 자율성을 지키려는 적극적인 결정에 가깝다.
반면 한국 부부들이 말하는 '남처럼 산다'는 건 물리적으로는 한 집인데 정서적으로만 멀어진 상태다. 누구도 먼저 선택 했다기보다, 대화가 줄어들다 보니 어느 순간 그렇게 굳어버린 경우가 많다. 집을 나눠 사는 것도 아니어서 주변에서는 문제를 눈치채기도 어렵다. 콜터 교수의 연구가 말하는 '자율성을 지키는 관계'와, 내 친구가 웃으며 말한 '그냥 남처럼 산다'는 말 사이에는 꽤 큰 거리가 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
영국에서 7년을 살면서 배운 게 있다면,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는 게 오히려 관계를 오래가게 한다는 거였다. 계좌를 나누고 취미를 따로 갖는 게 결혼의 실패가 아니라 결혼을 지속하는 방식일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문제는 '따로'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게 대화 끝에 나온 선택이냐 아니면 대화가 끊긴 결과냐다.
친구 얘기를 들으면서 남 일 같지 않았다. 나도 언젠가 아이 얘기 말고는 할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 아이 없이 둘이서만 하는 대화 시간을 만들려고 한다. 아이들은 이제 우리 없이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 나이가 되어 버려, 둘이서 카페타임을 갖거나 교외 드라이브를 하기 시작했다. 또한 평상시 거창한 건 아니고, 저녁에 애 재우고 나서 그날 하루 어땠는지 딱 십 분만이라도 서로한테 묻는 거다. 그게 재정을 합치는 것보다, 성을 어떻게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참고 출처
· 60대 부부의 정서적 거리감에 관한 국내 보도 (MSN, 성장곰)
· ONS(영국 통계청) — Census 2021, People's living arrangements in England and Wales
· University College London / Rory Coulter — UK Household Longitudinal Study(UKHLS) 2011-2023 기반 LAT 연구
· The Journals of Gerontology: Series B — Living Apart Together and Older Adults' Mental Health in the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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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사는 결혼'까지 가지 않아도, 영국과 한국 커플들이 반지 하나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이 온도차가 그대로 보여요.
▸ 영국은 반지에 더 진심이 되어가고, 한국은 반지의 무게를 덜어내는 중이다
결혼 자체를 하는 사람이 줄어드는 흐름은 100세 시대 계산법으로도 짚어봤어요.
▸ 영국은 결혼 밖으로, 한국은 결혼 안에서 — 100살까지 산다면 30대 결혼도 70년 프로젝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