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학 기숙사엔 '남녀 혼성' 항목이 있다

안녕하세요. 영국에서 7년 거주하며, 브리스톨에서 석사 경험을 가지고 있는 브리스톨 언니입니다. 오늘은 영국 대학 기숙사에 있는 '남녀 혼성' 항목 이야기를 해볼게요.


영국 유학 전까지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해 본 경험이 전무했던 사람이라, 석사 기숙사 신청서를 받아 들고 나는 눈을 의심했다. 선택 항목이 딱 두 개였다.

금연이냐 흡연이냐, 그리고 — 남녀 혼성(Mixed)이냐 여자만(Only Female)이냐.

나는 그때까지 부모님 곁을 떠나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주변에 자취하는 지방 친구도 거의 없어서, 낯선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사는 것 자체를 몰랐다. 그런데 그 낯선 사람이 심지어 남자일 수도 있다니. 나이에 비해 순진했던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금연 & 여자만'을 골랐다.

금남의 집에서 보낸 한 달

내가 들어간 기숙사 호수에 도착해서 알았다. 여자만 사는 곳이라 그런지, 살고 있는 사람이 전부 한국·중국·일본 여학생들이었다. 여중고를 나온 나한테는 오히려 익숙한 그림이었다. 잠옷 바람으로 복도를 돌아다니고, 밤 9시만 넘으면 다들 조용히 잠자리에 드는, 지나치게 모범적인 생활이 한 달간 이어졌다. 나중에 알았는데, 외국인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 호수는 '금남의 집'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남녀혼성 기숙사가 얼마나 다른 세계인지 전혀 몰랐으니까.

학기가 시작되며 신세계로

학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다른 기숙사로 옮겨야 했고, 금남의 집에 살던 동양 여학생들은 전부 남녀혼성 기숙사로 흩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완전히 다른 생활을 만났다.

밤 9시면 조용해지던 우리 기숙사와 달리, 이곳은 밤늦게까지 파티가 끊이지 않았다. 유럽 학생들은 금요일이면 1차로 기숙사에서 술을 마시고 2차로 클럽에 갔다. 아시아 학생들이 조용히 요리해 먹거나 소소하게 마실 때, 유럽 학생들은 음악을 크게 틀고 춤을 췄다. 체력도 어찌나 좋은지, 같이 놀다 보면 나만 항상 먼저 지쳐 있었다.

부엌은 늘 지저분했다. 남녀 할 것 없이 치우지 않는 학생이 훨씬 많았다. 여름엔 정원에서 바비큐 파티가 열리고, 부활절이나 할로윈 같은 절기 행사도 함께 챙겼다. 한국에서는 친구들끼리 술집이나 노래방을 가는 게 전부였다면, 여기서는 다들 부모님과 떨어져 사니까 기숙사 자체가 하나의 놀이터였다.

여자들끼리만 있을 때는 몰랐던 것도 보였다. 여자만 있는 곳에서는 은근히 '파'가 나뉘고,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 서로를 흉보는 일이 잦았다. 남녀가 섞이니 오히려 그런 신경전이 줄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새침하게 거리를 두던 영국 여학생들보다는 수줍음 많은 영국 남학생들, 혹은 호의적인 다른 유럽 출신들과 지내는 편이 훨씬 편했다.

남녀가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것

영국은 월세가 워낙 비싸서, 낯선 남녀가 한집에 사는 '하우스 쉐어'가 아주 흔하다. 대학생뿐 아니라 미혼 남녀, 심지어 부부도 다른 사람과 방을 나눠 쓴다. 런던처럼 월세가 극단적인 도시일수록 더 그렇다.

기숙사 방에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놀러 와 함께 지내는 일도 흔했다. 공식적으로는 금지였지만 다들 눈감아 줬다. 아예 생활비를 아끼려고 동거하는 커플도 있었다. 옆방 일본 남학생은 스페인 커플의 일 년 치 동거 소음 때문에 매일 밤 귀마개를 끼고 잤고, 프랑스에서 여자친구가 놀러 와 일주일간 저녁까지 같이 먹던 남학생은, 그 여자친구가 돌아가자마자 다른 여자와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좀 낯뜨거운 기억이다.

같은 호수에 살던 유럽 남학생과 아시아 여학생이 사귀다 졸업 후 결혼까지 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사실, 나와 지금의 신랑도 같은 기숙사 — 다른 빌딩이었지만 — 에서 처음 만났다. 남녀혼성 기숙사가 우리 부부에게는 오작교였던 셈이다.

서울 촌뜨기가 그렇게 문화충격을 받으며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던 그 시절이 이제는 아득하다. 그때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신나게 놀았어야 했나 싶은 후회도 잠깐 든다. 그래도 가장 잘한 일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 그 기숙사에서 신랑을 만난 것이다. 언젠가 우리 부부의 연애 시절 추억이 남아 있는 브리스톨과 바스에, 다시 한번 같이 가보고 싶다.